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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 이대로 좋은가(12)|타율에 젖어 규제풀면 "마음대로"|자치능력 결여된 「반숙사회」|시험감독 없으면 커닝 예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흔히 우리사회를 「반숙사회」라고 한다.>
또 어떤이는 공중은 없고 군중만이 존재하는 「군집사회」라고도 혹평한다. 자율정신이 결여된 뼈대없는 민주주의 시민의식에 대한 비판이다.
『음란퇴폐영화로부터 청소년을보호하자.』
지난4월 영화계는 저속성애영화가 쏟아져나오는 가운데「청소년보호결의대회」를 열어 눈길을 모았다.

<저속영화의 홍수>
외설영화 선전과 관련, 영화사대표4명이 검찰에 구속되고 전체의 절반이 넘는 45개영화사가 검찰조사를 받는등 당국의 일제단속에 자극받아 취해진 이같은 자율화·개방화추세속의 자율적 공연질서확립 결의대회는 다름아닌 자율의식의 결여에 따른 영화계의 자승자박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꽤나 공교롭다.
공연윤리위원회가 영화인의 자율성보장방침을 발표한지 1년4개월.
그러나 검열완화가 곧 영화인들이 입이 닳도록 외쳐온 자율적규제로 이어지지 못한 결과였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와 올상반기동안 제작된 영화 1백5편중 애정물이 54편에 달했고 이들은 거의 허황된 즐거리와 낯뜨거운 성애장면을 무분별하게 담고있다.
『표현의 자유가 고작 에로영화냐』는 지탄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걸핏하면 열린 토론회·다짐대회가 결국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던 영화업계의 고질을 보아온 한 시나리오작가는 『요즘의 영화업계가 자율화시대에 제대로 적응못해 검열강화를 자초할까 두렵다』고 말했다.
이처럼 타율에 길들여져 자율을 실천하지 못하는 예는 우리주변에서 항상 볼수있다.
K대대학원 1년생인 김모씨(25) 는 달포전 난생처음 이른바 무감독시험을 치른적이 있다.
더운 날씨탓은 아니겠지만 교수는 문제 몇개를 던져놓고는 말없이 강의실문을 열어 놓는가 싶더니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
대학생중 커닝경험이 있는 학생이 72%에 달한다는 한 조사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대학원에서의 커닝을 상상조차 안해본 김씨는 이날 자신의 양심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10여명의 동료원생들의 재빠른 커닝동작에서 자신만 바보처럼 낙오자가 될것같은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끝내 양심을 등지고 만 김씨는 지금도 자괴감을 곱씹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누군가 하겠지…">
몇해전 서울시내 일부국민학교에서 무감독시험을 시범적으로 실시할때도 서울시교위의 한관계자는 『이제 우리학생들도 감독없이 시험칠수 있는 자율능력이 생겼다』며 『이 제도가 정착되는대로 시내 전체학교로 확산시키겠다』고 낙관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후 무감독시험을 실시하고 있는 학교는 찾아볼수 없었다.
애시당초 날로 치열해가는 경쟁사회에서 자율시험을 기대한다는게 「웃기는일」이라는 일선교사들의 자조섞인 지적이었다.
지금까지 코피나 대중음식등의 가격자율화가 곧 가격인상을 의미해온 사실에서도 우리는 자율의 왜곡현상을 똑바로 볼 수 있다.
서울 모경찰서 형사계직원들은 벌써 몇년째 일반전화없는 불편을 감내하고 있다. 물론 외부로부터 받는 전화나 경비전화는 이용가능하다. 그러나 공무로 외부에 전화를 걸려면 줄을 서면서까지 구내 공중전화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앞에 나서서 전화가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불편시정을 위해 전화 가설을 상부에 건의하기보단 그저 여건에 순응하고 어느날 까지고 상부의 배려만을 기다린다는 자세들이다.
불필요한 전화를 안쓰게돼 절약을 생활화한다는 취지와는 별도로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탈권위와 합리적인 자결능력인데도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공직사회에서의 자율부재는 자칫 주민들의 자치의지마저 꺾어놓기도 한다.
지난달 9일 인천시부평3동M아파트 주민들은 투표를 통해 통장을 선출했다.
전임통장의 무성의를 문제삼아 동사무소에 해임건의를 했던 주민들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주간의 선거공고기간을 거쳐 이날 선거위원 47명의 엄정한 진행아래 2명의 입후보자에 대해 선거를 치렀던것.
그러나 시조례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합리적 절차에 따른 주민의사라면 통장임명에 고려하겠다』는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동장은 선거결과를 무시한채 제3의 인물을 통장으로 임명해 버렸다.
주민들의 민주적의사를 묵살한 동장의 처사에 대해 주민들이 『다가올 지방자치시대를 생각할때 이런식의 일방적인 관치일변도 행정은 자율화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일선행정기관의 무소신을 비난하고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반상회 유명무실>
이렇게 자율이 외부적요인에 의해 저해받는 경우가 있는 반면 일상생활속에서 스스로 주체성을 상실한 「주변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예도 허다하다.
대학강의실이나 모임에서 뒷자리나 구석자리가 항상 인기인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최근 반상회실태조사 결과에서 보듯 민주화추세속에 반상회가 크게 위축, 참석률이 평균 4O%를 밑돌고 아예 열지도 못하는 경우도 전체 조사대상반의 1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대해 『자율의사결정과정을 통한 자치능력배양등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반상회가 아직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외부적 요인보다 주민자신들의 저조한 참여의식에 기인한다』고 한 관계공무원은 지적했다.

<주인의식 사라져>
사회학자들은 뿐만아니라 우리가 청산해야할 것중의 하나인 외래지향적이고 사대적인 몰주체성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자 치능력과는 동떨어진 타율의 역사속에 안주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당당한 주인정신과 함께 자율의식구조를 내면화하지 못한것은 중용과 과묵, 초연함등의 미덕으로 여겨져왔던 우리의 습속과 농경문화적 유산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실제적 강압이 없는한 개인적 편의주의에 쉽게 휩쓸리고 다수의 의사가 소수의 강경논리에 기를 못편다든지 조직운영이 일개인의 카리스마에 좌우되고 자율적 이성에 따르기에 앞서 경솔한 군중심리에 쏠리는 수가 많다. 또 책임의식이나 질서관념이 희박한 나머지 공중도덕을 외면하는등 우리사회는 아직도 반숙사회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심윤종교수(성대·사회학) 는 『우리에게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상대주의에 입각한 자율적 행동규범의 확립』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는『참여와 협동, 준법과 고발, 주인정신등을 통한 자치능력의 개발과 교육제도등의 전향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심교수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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