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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재떨이 깨며 日과 협상···하늘로 간 '타이거 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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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016년의 박운서 전 통상산업부 장관. 교통사고 이후 치료를 받을 때 찍은 사진이다. 권혁재 기자

2016년의 박운서 전 통상산업부 장관. 교통사고 이후 치료를 받을 때 찍은 사진이다. 권혁재 기자

공직자에서 기업인으로, 말년엔 필리핀 원주민에 봉사하는 사회사업가로 '인생 3모작'을 한 박운서 전 통상산업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이 24일 새벽 5시쯤 필리핀 마닐라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80세. 고인은 2015년 필리핀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생긴 폐·신장 기능 이상과 섬망증으로 투병해왔다.

박운서 전 차관 24일 필리핀서 별세 #대일 통상협상때 '타이거 박' 별명 #"남은 인생 남을 위해 살겠다"며 #은퇴후 필리핀 원주민 돕기 투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투병해와 #"봉사 안했으면 장관 하려 주책 떨었을 것" #"코드 맞춰 승진할 생각마라" 후배 질타도 # #

1939년 경북 의성 출신인 고인은 대구 계성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행시 6회에 합격해 1968년 옛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청와대 경제비서관과 공업진흥청장을 역임했고 95년 통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28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쳤다. 관가에선 '타이거 박'으로 불렸다. 상공부 통상진흥국장 시절 얻은 별명이다. 83년 도쿄(東京)에서 일본과 무역협상을 벌일 때 재떨이를 깨뜨릴 정도로 격론을 벌이며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고 일본 언론이 붙여줬다.

당시 공기업인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을 거쳐 고(故) 구본무 회장의 요청으로 LG그룹에 몸담았다. 적자에 허덕이던 데이콤 회장을 맡아 흑자 회사로 바꾼 뒤 2003년 말 은퇴했다.

박운서 전 차관이 교통사고 치료를 받고 난 다음, 그의 오른쪽 발의 모습. 권혁재 기자

박운서 전 차관이 교통사고 치료를 받고 난 다음, 그의 오른쪽 발의 모습. 권혁재 기자

은퇴 이후 고인은 여느 고위 공무원 출신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필리핀 오리엔탈 민도로섬에 사는 원주민인 '망얀족' 돕기에 투신했다. 민도로섬은 마닐라에서 차로 두 시간, 배로 세 시간을 가야 하는 오지다. 망얀족 거주지는 다시 서너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오지 중에 오지다. 2005년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본지 인터뷰에서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남은 인생은 남을 위해 살겠다"고 말했다. 앞으론 자신을 '타이거 박'이 아니라 '언더우드 박'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 후 10여년을 필리핀 밀림에서 촌로처럼 보냈다. 15ha의 땅을 사서 벼농사를 지었다. 농작물 재배법을 공부해 시행착오 끝에 연간 4000여 가마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이걸로 망얀족 아이들 밥을 먹이고, 교회 14곳을 세웠으며, 농사법을 가르쳤다.

2015년 필리핀 현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트럭이 전복되면서 언덕을 굴렀다. 구겨진 차제 조수석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하반신 곳곳이 참혹하게 부서진 상태였다. 현지 병원 의료진은 괴사한 그의 발가락들을 절단했다. 의식불명인 채로 서울로 후송됐다. 다행히 의식은 찾았지만 양쪽 무릎과 정강이엔 철심이 박히고, 요도엔 평생 달고 살아야 할 도뇨관이 달려있었다. 오른발은 엄지발가락뿐이었다. 그나마 엄지발가락이 하나 남은 덕분에 그는 목발을 짚고 설 수 있었다. 애써 몸을 추스른 그는 다시 필리핀 원주민에게로 돌아갔다.

박운서 전 통상산업부 차관. 공직과 기업에서 은퇴하고 2005년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떠나기 직전에 본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고위 공직자와 기업 경영자 시절엔 항상 기사 딸린 승용차가 있었지만 은퇴 이후엔 차가 없다. 아내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버스타기 연습'을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권혁재 기자

박운서 전 통상산업부 차관. 공직과 기업에서 은퇴하고 2005년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떠나기 직전에 본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고위 공직자와 기업 경영자 시절엔 항상 기사 딸린 승용차가 있었지만 은퇴 이후엔 차가 없다. 아내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버스타기 연습'을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권혁재 기자

고인은 2015년에 쓴 『네가 가라, 내 양을 먹이라』에서 필리핀 봉사생활을 '은혜와 축복'이라고 적었다. "만약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정치판에 뛰어들었거나 자유경쟁의 논리를 부르짖다 보수꼴통으로 몰렸거나 장관 자리 맡아보려고 주책을 떨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이 은혜와 축복을 하나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2005년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미친 듯이 일했으며 내 브랜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공무원 시절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후배 공무원들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던졌다. "과거에는 사명감에 불타 윗사람하고 부딪치기도 했는데…. 요즘은 10년 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대신 코드 맞춰가며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만 하는 것 같아." 하필이면 국제 통상규범에 한참 어긋나는 일본의 수출 규제로 나라 안팎이 어지러울 때, 대일 통상협상장을 호랑이처럼 주무르던 '타이거 박'이 떠났다.

유족은 부인 김옥자씨와 아들 찬준·찬훈·찬모씨가 있다. 빈소는 고인의 유해가 국내로 운구되면 27일 낮 12시 이후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19호실에 마련될 예정이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다.

서경호 기자 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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