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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규제 2주]강경해졌지만 출구 열어뒀다, 文의 대일 메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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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대일(對日) 침묵을 깬 건 수출 규제 조치가 발표된 지 일주일 만인 지난 7월 8일이다. 그 사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대서특필되고 여의도에선 정치인들이 성토대회를 벌어진 데도였다. 대통령이 공개 발언을 하는 행사가 3개(2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 2주년 성과 보고대회, 3일 한국교회 주요 교단장 초청 오찬간담회, 5일 제2회 대한민국 사회적 경제 박람회) 있었지만, “일본”이란 단어는 8일 대통령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처음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전례 없는 비상상황, 정치적 목적에 우려”(지난 8일 대통령 수석보좌관회의)

첫 메시지는 이랬다. 문 대통령은 “최근 일본의 무역 제한 조치에 따라 우리 기업의 생산 차질이 우려된다”라거나 “민간기업 간 거래를 정치적 목적으로 제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우려하고 있다”면서 ‘우려’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전례 없는 비상한 상황”이라고 인식하면서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맞대응은 자제하고, 외교로 풀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그는 “대응과 맞대응의 악순환은 양국 모두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일본 측의 조치 철회와 양국 간의 성의 있는 협의를 촉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기업들에게 피해가 실제적으로 발생할 경우 우리 정부로서도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지’를 뒀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만 해도 “일본이 정확하게 어떻게 경제 보복을 할지가 아직 불분명한 상황”이라며 “일본의 도발에 우리가 즉각 반응했다간 말릴 가능성도 있다. 일단 참의원 선거(21일) 추이를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모드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열린 경제계 주요인사 초청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열린 경제계 주요인사 초청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사태가 장기화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지난 10일 경제계 주요 인사 초청 간담회)

이틀 뒤 문 대통령은 사태의 ‘장기화’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지난 10일 기업 총수 30여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도 했다. 일본 정부와의 장기전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21일 참의원 선거가 끝나도 문제가 끝나지 않을 것으로 인식을 전환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비상한 각오’라는 표현이 이때 처음 등장했다. 일본 정부의 의도는 역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우리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으로 파악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대북제재를 언급하며 “수출을 제한한 세 개 품목이 북한의 화학무기로 전용된다”는 취지로 주장한 데 대해선 “아무런 근거 없이 대북제재와 연결시키는 발언을 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와 안보 협력 관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여전히 “외교적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화답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무안 전남도청에서 열린 전남 블루 이코노미 경제비전 선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무안 전남도청에서 열린 전남 블루 이코노미 경제비전 선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전남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12척 배로 나라를 지켜내”(지난 12일 전남 블루이코노미 경제비전 선포식)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점점 강경해졌다. 지난 12일 전남을 방문해 원고에 없던 ‘이순신’ ‘열두 척의 배’ ‘호국정신’ 등의 단어를 꺼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을 상대로 한다. ‘이순신’은 자연스레 일본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전남의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는 대목은 경제 대국인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 전쟁’ 과정에서의 강한 단결을 강조하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그의 명분으로 제시한 전략물자 대북 반출 등 각종 의혹에 대한 정면 돌파 의지이기도 했다. 이날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수출규제 조치의 근거로 한국의 대북제재 위반을 시사하는 아베 총리 등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향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패널이나 적절한 국제기구에 한·일 양국의 4대 수출통제 체제 위반 사례에 대한 조사를 동시에 의뢰하자”고 제안했다.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15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한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15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한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결국에는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지난 15일 대통령 수석보좌관회의)

사흘 뒤 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약 2480자 분량의 미리 준비한 모두발언을 했다. 이날 모두발언은 전부 일본 정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경고’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 “결국에는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였다. 주요발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이번에 전례 없이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문제와 연계시킨 것은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역행하는,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 “일본은…(생략)…우리에게 전략물자 밀반출과 대북제재 이행 위반의 의혹이 있기 때문인 양…(생략)…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하고 제재의 틀 안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우리 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는…반세기 간 축적해 온 한·일 경제협력의 틀을 깨는 것”….

문 대통령은 약 8분간 작심 발언을 쏟아내면서도 “이제라도 외교적 해결의 장으로 돌아오라”는 촉구도 를 빼놓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의 메시지는 톤이 강하든 약하든  언제나 두 파트다. 첫 번째는 우리 안이 유일한 대안이 아니니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계속 보복하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열린 정당 대표 초청 대화 시작에 앞서 충무전실에서 여야 5당 대표들과 환담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9.7.18. 한겨레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열린 정당 대표 초청 대화 시작에 앞서 충무전실에서 여야 5당 대표들과 환담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9.7.18. 한겨레 청와대사진기자단

“반일(反日) 감정은 갖고 있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지난 18일 대통령-여야 5당 대표 회동)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여야 5당 대표와 대화하던 중 이런 말을 꺼냈다. 반일감정은 갖고 있지 않고, 가질 생각도 없다고. 대화 주제가 ‘국민의 반일 감정’으로 옮아 왔을 때였다. 점점 강경해진 메시지가 감정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의 대응을 고려한 전술적 차원이었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대목이다. 대일특사 파견, 한·일 정상회담 등 ‘톱다운(Top-down)’ 방식의 외교적 해결법을 주장하는 야당 대표들에게 문 대통령은 “여건이 되면 특사는 얼마든지 보낼 수 있지만, 무조건 보낸다고 되는 건 아니다. 협상 끝에 해결 방법으로 논의가 있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일본 참의원 선거 이후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 화이트리스트(우대국)에서 한국 배제 여부, 실제 한국 기업의 피해 발생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면서 대응 카드를 국면마다 달리하겠다는 뜻이다. 현재로선 미국을 움직이는 쪽으로 전략을 세운 듯하다. 이날 회동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폐기 요청(심상정 정의당 대표)에 대해 “지금은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 재검토 할 수 있다”고 말한 데 이어, 바로 다음 날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직접 나서 지소미아를 옵션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 같은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일본에 ‘출구’를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익명을 요청한 외교안보전문가는 “지난 1~6월 한·일 간 양자 교섭을 하자는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 일본이 다른 입장(제3국 중재)으로 옮겨간 것”이라며 “청와대가 외교적 해결이란 메시지를 던졌다고 주장하거나 (스스로)그렇게 믿을 수는 있으나, 일본이 그렇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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