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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홍은동 야산서 숨진채 발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정두언. [뉴스1]

정두언. [뉴스1]

정두언(62·사진)전 새누리당 의원이 16일 서울 홍은동 자택 인근 북한산 자락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과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이날 유서를 발견한 정 전 의원의 부인이 경찰에 신고했고, 한 시간 뒤인 오후 4시 25분쯤 경찰이 숨진 정 전 의원을 발견했다. 정 전 의원은 두 시간 전 운전기사가 몬 차량에서 내린 뒤 산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고 한다. 경찰은 정 전 의원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전 의원과 가까운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정 전 의원의) 딸이 유서를 확인했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고 (다른) 특별한 내용은 없다”고 전했다. 정 전 의원은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서 남겨 #당일 오전에도 라디오 방송 출연 #김용태 “평소 우울증 앓았지만…”

고인은 ‘비운의 책사’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핵심 참모였으나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기는 짧았다. 2008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엔 모두 그와 연락하길 원했다. 청와대와 정부, 그해 4월 총선 공천 작업까지 관여한다고 알려져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곧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선 뒤처리 중 제일 크고 힘든 일이 (선거에서)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 문제다. 고통 그 자체다. 오죽하면 낙선한 측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까”라고 썼다.

고인이 밀려난 전모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사정 당국자에게 이 전 대통령의 의혹 자료를 요구했다가 이 전 대통령이 알고 질책한 게 계기였다는 얘기가 있다. 고인은 이후 이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 등 권력 주변의 문제를 집중 제기했다. 2008년 3월 “권력을 사유화한다”고 비판한데 이어 이상득 전 의원의 불출마와 2선 후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른바 ‘55인 파동’이었다. 고인은 그 즈음 사석에서 “소장파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한다는 데 의리 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양쪽을 다 아는 인사들은 “2011년 무렵까진 이 전 대통령이 불러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던 듯하다”며 “어느 날 펑펑 울곤 마음을 정리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후 삶은 신산했다. 2012년엔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됐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정치적으로 재기했지만 20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1980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무총리실에서 주로 근무했다. 당구장집 아들로 소년시절 당구가 200이었다고 한다. 경기고 재학 땐 밴드 보컬을 담당했다. 정치인이 돼서도 음반을 내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스스로 “가수”라고 소개하길 즐겼다.

2000년 4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로 16대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원외 위원장 시절이던 2002년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던 그를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려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찾아 오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2004년 17대 총선 서울 서대문을에서 당선된 이후 내리 3선했다.

고인은 낙선 시절엔 종편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이날도 오전 10시께 SBS 라디오 ‘이재익의 정치쇼’에 출연했다.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에 일식집을 열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용태 의원은 고인이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했다. 김 의원은 “(우울증은) 정치를 하며 숙명처럼 지니는 것”이라며 “상태가 상당히 호전돼 식당도 하고 방송도 활발히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과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험을 털어놓기도 한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난 삶’이라며 “칠십 이후 여생은 카운슬러를 하며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빈소는 17일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다.

고정애·유성운·박사라 기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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