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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대 고송무교수가 행적 밝혀|소망명 한인작가 조명희 재조명작업 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소설 『낙동강』등으로 일제하 우리 프로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포석 조명희(1894∼1942)의 동상이 한인 문학인으로서는 최초로 소련에 세워진다.
포석의 제자이며 현재 소련한인문단의 원로인 강태수·김준·김증순씨등은 포석탄생 95주년인 올해 내로 조명희기념비 동상을 세우기로하고 소련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모금에 들어 갔다.
1925년 단편『땅속으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프로문학활동을 펼친 포석은 이후『낙동강』 『춘선이』등 10여편의 소설을 발표해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28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포석은 선전·선동만이 앙상하게 난무하던 우리의 초기프로문학에서 문학성을 지닌 수준높은 작품으로 당대 리얼리즘문학을 한단계 끌어올린 중요한 역사적 성과를 이룩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 소련망명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핀란드 헬싱키대에 재직하며 소련한인사회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고송무교수(42)에 의해 소련내에서의 그의 행적및 한인문단에 끼친 영향이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조명희가 우리 소학교로 와서 뒷동산을 등탑봉이라 이름지었다. 그는 식솔도 없이 3년간 혼자살면서 등탑봉의 아름다운 산기슭을 돌아다니며「10월의 노래」 「볼셰비키의 봄」「여자돌격대」「샘물」「새회의」등의 시를 썼다.
그는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시를 쓰며 혼자살다 황명희를 만나 결혼한 후 31년 이른봄 육성촌을 떠났다.
하바로프스크로 옮겨살던중 1937년 밤 경찰 세사람에 의해 끌려갔다. 포석은 끌려가면서 아내에게 「나는 아무 죄도 소비에트 주권앞에 지지않았소. 마음 푹놓고 기다리시오. 사흘후면 집으로 돌아오겠소」라고 말했다. 그 이후 포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42년 2월 20일 사망했다는 통지가 왔을 뿐이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모르며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련내에 생존해 있는 포석의 제자·처남·딸등의 회고로 대충 훑어본 그의 소련망명 후행적이다.
이들의 직접적인 증언을 채취, 종합한 고교수는 포석의 작품활동은 홀로살며 교편을 잡고있던 1928년∼1932년에 활발히 이루어진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 시기에 산문시인『붉은 깃발아래서』와『짓밟힌 고려』등도 쓰여졌다.
결혼후 하바로프스크로 옮긴 포석은 선봉신문사에 재직하며 거기에 1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후 1934년 소련작가 동맹 창설당시부터 회원으로 참석, 36년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부로 활약하며 소련한인 문학육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37년 봄부터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다룬 장편 『만주빨치산』집필에 들어갔으나 그해 가을 스탈린정권에 의해 숙청됨으로써 탈고하지 못했다.
스탈린 사후 1956년 포석은 명예회복됐다. 명예회복뒤 처남 황동민씨가 모스크바 도서관등에서 포석에 대한 자료를 수집,『조명희선집』을 출간했다.
국내에서는 작년 7·19 해금조치이후 풀빛출판사에 의해 주로 국내에서 창작한 작품을 모은 선집 『낙동강』이 출간됐으며 일제하및 해방공간 프로문학연구가들에 의해 현재 그에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56년 엄호석이 『조명희연구-그의 인간과 예술』 이란 연구서를 펴냈고 『조선문학』 1958년 10월호에는 소련에서 창작된 작품을 싣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에서 결혼한 부인 황명희씨는 71년 사망했으며 유족으로는 딸 조왈렌치나(한국명 조선아), 아들 조미하일(조선인)이 타슈켄트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유족들과 제자인 소련 한인문단 원로들이「조명희 문학유산위원회」를 결성, 1988년12월10일 우즈베크공화국문학박물관에 조명희 전시관을 마련, 조명희로하여 한인문학의 긍지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학인의 첫 동상인 조명희기념비는 우리의 스승이며 조선카프문학과 소비에트문학 창시자인 조명희탄생 95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기념으로 드리는 바이다.』 소련내 첫 한국문학인 동상에 새겨질 위와같은 비문이 말하듯 우리에게는 물론 소련에서까지 푸대접 받았던 포석 조명희가 소련한인문학, 나아가 소비에트문학의 한 스승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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