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지러운 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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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사회에서 맥을 못 추는 말이 몇개 있다. 강력 단속, 일제 소탕, 발본색원, 기습 단속, 기동 순찰, 전행정력 동원, 무기한 단속과 같은 말들이다. 아마 찾아보면 더 있을 것이다.
경찰도 말만으로는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303수사대, 폭력소 탕 특수대, 특수 기동대, 5분 대기조, 특별 단속반, 이동 파출소 등 별의별 기구를 다 만들었다.
경찰이 좋아하는 말이 「특」자라는 것도 인상적이다.
하나같이 서슬이 퍼렇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기구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호령과 기구들을 보고도 누구 하나 놀라는 사람이 없는 것은 웬일인가. 우선 범죄자들이 놀라기는커녕 뒤에 앉아 웃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찬다.
경찰은 모처럼 큰기침하며 마음먹고 「기습 단속」이나 「일제 소탕」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범죄꾼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다. 폭력 단속 특별령이 내린 가운데, 서진 룸살롱 살인극과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인신 매매 무기한 단속한다는 장담을 들은 것이 벌써 골백번은 되는데 지금도 청천백일하에 해수욕장에서 붙잡혀 팔려간 여자도 있었다.
동네 수영장에 공짜로 입장시켜주지 않는다고 자그마치 10여명의 폭력배가 달려들어 시설물을 부수고 풀 속에 유리 조각을 던져 넣었다. 경찰이 출동하기는 했는데 붙잡힌 범인은 2명뿐이었다. 경찰이 물러가자 폭력배들은 다시 나타나 난동을 계속했다. 무려 1시간10분에 걸쳐 벌어진 일이었다.
내무장관은 요즘 국회상임위에서 거듭 속시원한 약속을 하고 있다. 『8월말까지 1단계로 13만 경찰과 17만 지방 행정력 등 30만 내무 공무원을 충 동원해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민생 치안을 확립하겠다』
말 값의 절반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는데 어디 8월말까지 두고 볼 일이다. 피부로 느낄 정도면 한밤중에도 부녀자들이 골목길을 마음놓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벌써 앞서는 걱정은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기 전에 피부가 근지러운 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예산 타령, 동원 인력 타령, 시국 타령, 수사력 타령은 이미 몇십년을 두고 들어온 얘기다. 혹시라도 8월이 다 지나 국민들이 근지러워할 때를 생각해 그런 말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다 아는 얘기를 또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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