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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번영을 꿈꾼다…남북 ‘서로 다름’부터 인정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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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호 26면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지난 19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박명림 교수의 칼럼은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위기감을 표현하면서, 그 대책으로 대의제도의 강화를 권하였다. 대의제도를 강화한다는 것은 오늘날 마비 상태 들어간 듯한 국회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제도의 역사에 비추어서 국민이라고 부르는 대중에 더하여 지도적 인물들의 현명한 지혜들이 정치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 순환하듯 사회 가치도 변화 #소련 붕괴 후 대세 된 민주주의도 #패권·민족주의 위협에 위기 몰려 #보편성·휴머니즘 후퇴 경계하고 #북한도 인간 행복의 가치 인정을

박명림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가 처하게 된 위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그중의 한 가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민의 이름 뒤에 감추어진 미숙한 정치적 지혜, 또 그 때문에 일어나는 독재적 또는 독단적 정책 결정이다. 그러나 보다 크게 보아서는 정치체제에 있어서의 영고성쇠와 순환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반성과 갱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순환론과 관계해서는 20세기 초에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그의 저서 『서양의 몰락』에서 펼쳐낸 문명 순환론이 특히 유명한 것이었다. 여러 자연 현상, 낮과 밤이라든가 또는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큰 원리로서의 순환을 표현한다. 슈펭글러가 주장한 것은 문명에도 그러한 순환이 있고, 그의 저서의 제목에 나와 있듯이, 서양 문명도 그 번성기를 지나 이제 몰락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서양 문명에 견주어, 이집트·수메리아·마야 문명 등 오랜 역사의 긴 시간 속에 사라진 문명들을 언급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당대에 쇠퇴 상태에 있던 아시아 지역 문명이 새로 일어나리라고 말한 그의 예언이다.)

민주주의는 반공적 성격일 때 힘 얻어

슈펭글러가 말한 것은 문명과 문화 그리고 사회의 흥망이지만, 순환은 반드시 그러한 예정된 문명의 운명(運命)에만 해당된다고 할 수는 없다. 문명, 문화, 사회 체제는 역사 속에 형성된 일단의 질서를 말하는 것인데, 그러한 질서가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합쳐서 하나의 질서의 체계를 이루는데, 그것이 와해되고, 새로운 요인들이 등장하고 결합함으로써 다시 혼란과 질서로의 이행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 현상이나 사회 현상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러한 순환을 신비주의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성쇠와 흥망의 순환은 문명과 같은 큰 체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작고 단기적인 인간 질서에서도 볼 수 있다. 최근의 외신 보도와 논술에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한 것이 적지 않다. 거기에 위에서 말한 슈펭글러의 문명 순환론을 언급하는 글이 있었다. 다만 문명의 순환이든 아니면 보다 작은 시대적 사고의 지평의 전이(轉移)이든, 그러한 순환 또는 전이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적 그리고 현실적 대응들이 한정된 테두리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백인 중산 계층의 불만을 선동하고 정치화하고자 한 드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 정책에 보이고,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계획, 독일·프랑스의 민족주의 우파의 발흥,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재정난, 헝가리에서의 우파 정권 성립,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한 중국의 성장과 패권국가로서의 대두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일고 있는 변화들에서 감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평등·인권 등 민주주의의 중심 이념들이 위협을 받게 된다는 진단들이 확산된다. 중요한 것은 협량의 민족주의나 파당적 이해관계에 밀려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보편주의와 휴머니즘이 후퇴하는 것이다. 좁은 집단주의에 비하여 보편적 이념은 정치적 힘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 현실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반공적 성격을 가졌을 때 힘을 얻었는데, 보편주의로서의 민주주의의 후퇴는 그에 대한 적대 진영이 사라진 것과 관계된다. (적이 있어야, 또는 적을 찾아내야, 정치에 힘이 생긴다는 어떤 정치 이론의 설명이 여기에도 해당된다.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도 이것을 전략화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적(敵)은 한동안, 세계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이었다. 1980년대 말로부터 시작된 여러 변화로 소련은 1991년에 이르러 공식적인 해체에 이르게 된다. 1992년에 출판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저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 따르면, 마르크스 그리고 다른 역사철학자들이 말하던 역사의 진보 발전은 끝이 나고,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최종 종착점이 된다. 최근에 나오는 민주주의 위기론들은 이러한 역사 종말론도 끝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의 종착점으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냉전시대의 소산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칭관계로 하여 이데올로기로서 강화되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강조되었던 것은 이 대칭 세력의 존재에 관계되어 있었다. 자유는 핵심적인 민주주의의 이념이다. 시장의 자유도 경제적 원인에 못지않게 이러한 자유의 이념에 근거한다. 그러나 자유는 근본에 있어서는 인간 정신의 자유에 대한 믿음에 이어져 있다. 그리고 민주적 가치들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가치였다. 그리하여 자유에 이어 중요한 것은 평등이었다. 자유는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자유로운 경제 체제도 당연히 평등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것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의 기본적 삶의 조건의 확보를 위한 사회 안전망, 보다 발전된 사회에서는 교육과 의료제도의 사회화를 포함한 사회보장제도는, 민주주의 보편 이념에 비추어 필수 조건이 된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 특히 평등은 공산주의 이념에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들을 실천하는 데에는 혁명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하여서는 그러한 이념들도 유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와 같은 것도 유토피아 실현이라는 혁명의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민주주의 이념도 그 나름의 기율과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 그것은 억압과 통제의 구실로 작용한다.)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는, 혁명적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것인 만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대표되는 바 군사적 방어 체제를 요구하였다. 군사적인 측면이 아니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여러 면에서 방어적인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특히 냉전체제의 최전선이 되면서, 열전(熱戰)에 대응해야 했던, 그리고 여러 역사적 이유로 하여 좌우의 갈등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반도에서 그러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어 체제로서의 민주주의 체제는, 위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그 나름의 억압적인 면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항 세력으로서의 공산주의체제를 접근하는 것은 물론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최근 남북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러한 인식과 현실 실행의 틀이 이완됨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세계 체제로 성립된 냉전 체제를 벗어나는 일에 관계된다. 그리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적대적인 관점을 떠나서 남북이 교류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여러 가치와 목적들을 포기하거나 제한하는 일을 포함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서는, 이러한 가치들은 보편적 인간 가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인 만큼 포기하거나 제한될 수 없는 가치들이다. 그에 대한 위협이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런 가치에 관계되는 신념을 떠나서도, 남북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서로 다른 사회적 가치와 목적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의 다원성에 대한 민주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만큼 어떤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념들은 북에서도 최소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가치와 이념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내장하고 있는 이상의 하나이고 다원적 공존의 조건이다. 또 그것은 보다 높은 인간 이상의 시각을 가지고 모든 상황의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가치·이념 다원성 인정이 공존의 조건

물론 이러한 인간 이상의 수용과 상호 적응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문제에 곁들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념보다도 사실의 논리가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북에 관하여 들려오는 소식의 하나는 ‘장터’의 경제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상업과 교역의 발달이 국가 간의 평화를 가져오는 데에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 일이 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안녕과 행복은 부정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소원이다. 남으로부터 흘러들어 가는 물질적 번영의 소식도 이데올로기의 경직된 삶의 조직을 이완하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물질적 번영의 뉴스는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흘러들어 갈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이든 전체주의이든 정치의 바탕은 개인과 집단의 삶이 이루는 민생과 민심의 조류(潮流), 그리고 그 간만(干滿)이다. 정치권력은  이것을 조정하려는 파도 위의 힘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이해와 그것을 구성하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조합되는 가운데, 어떤 정치적 예지가 인간적 기본 가치를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적절한 전략으로 문제들을 해결하게 될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예측할 수는 없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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