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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비밀접촉 어떻게 해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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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역사의 뒷 얘기로 조금씩 밝혀져야 할 남북한 비밀외교·막후 접촉이 결실을 맺기 전에 진행과정에서 샅샅이 까발려지고 있다.
전쟁당사국이나 긴장상태에 있는 국가들이 상황타개를 위해 동서고금 다함께 구사하고 있는 막후· 비밀외교의 생명은 비밀성과 전격성에 있다. 72년 미 중수교의 디딤돌을 놓은 키신저의 밀사외교나 7·4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킨 이후락·박성철 접촉이 좋은 예다.
따라서 남북 고위 정상회담과 7·7선언 실천을 목표로 추진해 온 박철언 정무1장관의 대북 비밀접촉은 피기도 전에 지거나 복원하기 힘든 상황에 빠졌다. 이런 상황전개가 박철언 개인의 좌절로 끝날지, 아니면 남북관계의 기저를 흔드는 중대국면을 조성할지는 누구도 짐작하기 어렵다.
6공, 더 좁혀 말하면 박 장관에 의해 사단이 나고 만 남북비밀접촉은 지난 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4년8월12일 우리 적십자사의 제의로 시작된 남북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우리측 사무국 회담운영부장 정홍진씨(현 안기부자문위원)가 북한측과의 비밀접촉을 통해 평양을 처음 방문한 것은 72년3월 3박4일간 이었다.
정씨는 방북기간 중 김일성의 동생이며 당시 북한노동당조직부장 김영주를 만나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의 회담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이후락 정보부장은 72년5월2일부터 5일까지 정씨와 비서실장·주치의·경호원을 대동하고 청산가리를 소지한 채 평양을 방문, 김영주와 김일성을 만났으며 같은 해 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박수철이 서울에 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후 7·4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수 차례의 실무교섭이 있었고 남북직통전화가 가설된 것도 7·4공동성명 발표와 동시였다. 이렇듯 남북교류의 시작은 극도의 비밀과 보안 속에 이루어진 막후접촉에 의해 심지가 댕겨졌다. 그후 도끼만행사건(76년)으로 핫라인이 끊어졌다가 지난84년9월 북한의 수재물자 공급을 계기로 되살아났다.
그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85년4월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에 참가하는 이세기 당시·통일원장관에게 남북간 통일 창구를 시도해보라고 지시했고 이 장관은 북한최고인민회의부의장 손성필에게 제의, 동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핫라인의 책임자는 한국 측이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 북한측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실무책임자는 박철언 즉 당시 안기부장특보와 북측의 한시해 외교부부부장이었다.
이 핫라인 개설 후 그해 9월 허담이 서울을 다녀가고 10월에 장세동·박철언씨가 평양을 갔다 왔다.
핫라인과 인적접촉이 본격 가동된 것은 6공들어서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인척이자 실세인 박 정책보좌관은 어느 날 갑자기 안기부에 설치된 핫라인을 청와대로 끌고 왔다. 박 보좌관이 노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 핫라인을 옮긴다는 통보를 받은 당시 안무혁 안기부장은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대통령에게 항의했고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안 부장은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비밀접촉이 세상에 급격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국회의원·대통령 보좌관을 겸하고 있는 박 장관의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면서부터. 박장관은 베일에 가려져야 할 자신의 업무를 공·사석에서 은근히 과시했다는 것이고 이른바 「민족사업」을 자신의 전유물인 것처럼 비쳤다.
그는 사석에서 87년 이전 평양을 다녀온 사실을 시인했으며 평소에도 『허담은 신사다. 만나보면 북한측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다. 북한도 외교부(허담)와 보위부간에 세력다툼이 심한데 김일성의 인척이자 대남 유화론자인 허담을 우리가 도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의 대북 비밀접촉은 작년 하반기부터 금년 초에 피크를 이루었다. 이 무렵 그는 남북정상회담이 노 대통령 임기 중에 이루어지고 획기적인 남북교류증진이 있으리라는 예언 비슷한 것을 했고 노 대통령도 3김씨 등에게 유사한 설명과 언질을 주었었다.
지난 1월24일 박 장관은 한시해와 싱가포르에서 만나 우리측의 통일방안과 남북정상회담개최 문제 등을 제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의 전격 방북을 추진한 것도 이때였다.
정회장의 방북교섭에는 안기부와 군부가 철저히 배제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평양에 갔다오는 길에 오사카에서 안기부 요원의 접근을 물리치고 박 보좌관에게 직보했으며 정 회장의 방북성과와 체북 내용은 그가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박 보좌관에 의해 청와대기자실에서 발표되었다.
정 회장은 공항도착 즉시 함께 점심을 하자는 박세직 안기부장의 제의를 미루고 자택에서 점심을 든 뒤 바로 청와대로 박 보좌관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박 부장은 대통령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불만을 표시했고 박 보좌관과는 끝내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보좌관의 「전횡」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북한방문후 보인 정회장의 연동에 보수진영의 반발이 거세어지면서부터. 박 보좌관 개인베이스의 남북정책에 정부내 각 기관이 일제히 이의를 제기해 노 대통령으로서도 박 보좌관에게 자제를 당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거친 항의가 있었는데다 문익환 목사의 비밀방북이 터지자 박 보좌관의 날개에는 결정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요로를 통해 박 보좌관이 하는 비밀접촉의 무모성을 지적했다는 것이고 박 보좌관에게도 간접 경고했다. 박 보좌관은 은연중 자신이 미국의 견제를 받고있음을 암시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챈 노 대통령이 지난4월 박 보좌관을 미국에 보냈다 .미국은 박 보좌관에게 미국의 「정보위력」을 보여줘 내심 주눅들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박 보좌관은 핫라인과 남북관계에서 손을 떼고 청와대를 떠났으며 그의 비밀외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공개되어 그의 「쓸모」가 격하되고 말았다.
이제 어차피 박 장관을 창구로 한 남북간의 막후접촉은 끝장나는 것 같다. 새로운 채널을 구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며 남북대화도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부도 더 이상 부인만 하지 말고 사실을 그대로 공개하면서 국민들에게 남북 막후접촉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박 장관의 방북설 여파가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태수습의 한 방편일 수 있다. <김두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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