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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전혁림 작품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변한 돼지 축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허유림의 미술로 가즈아(17)

영국의 테이트 모던은 검은 연기를 내뿜던 화력발전소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연초제조창이 각각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지만 돼지 축사가 미술관으로 변신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곳은 공공 미술관이 아닌 사립 미술관이다.

보통 사립 미술관은 개인 소장가가 모은 다양한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하거나 작가로 활동했던 가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다. 그러나 이곳은 재벌도 아닌 한 개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과 그의 부인 신영숙 여사를 소개한다.

이영미술관 전경. 2001년 6월 돼지 축사를 개조해 미술관을 개관한 이후 2008년 영덕동으로 이사해 미술관을 신축했다. [사진 허유림]

이영미술관 전경. 2001년 6월 돼지 축사를 개조해 미술관을 개관한 이후 2008년 영덕동으로 이사해 미술관을 신축했다. [사진 허유림]

이영미술관은 김이환 관장과 부인 신영숙 여사의 이름 한자씩 따 명명됐다. 2001년 3000여 마리의 돼지를 기르던 3636.4㎡(1100여평)의 축사가 미술관으로 변신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이 공간에선 찬란한 예술이 꽃을 피우고 있다.

1977년 박생광의 작업실서 처음 조우

1977년 당시 44세였던 김이환은 74세였던 박생광(1904~1985)의 수유리의 작업실에서 그를 처음 만난다. 젊은 시절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던 김 관장은 흑모란 그림이 출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박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간 것이다. 160cm 안 되는 작은 체구의 박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리(그려)주지.”

그러나 그의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 매주 부부는 작가에게 필요한 물감과 재료를 들고 작업실을 찾았고, 노 화가는 계속 그림을 그려나갔다. 어느 일요일, 작가는 수줍은 듯 망설이며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다고 말했다. 김이환은 그때부터 1985년 세상을 뜰 때까지 8년 동안 그의 예술 활동을 물심으로 지원한다.

신영숙(왼쪽), 김이환 부부. 이영미술관은 김이환 관장과 신영숙 여사의 이름을 한자씩 따 명명됐다.[중앙포토]

신영숙(왼쪽), 김이환 부부. 이영미술관은 김이환 관장과 신영숙 여사의 이름을 한자씩 따 명명됐다.[중앙포토]

“박생광의 존재가 자칫 뒷전에 밀릴 뻔한 것을 역사의 무대 위에 끌어들인 사람이 김이환이다. 그는 박생광을 발견하고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부터는 온갖 힘을 기울여 음과 양으로 도와 많은 그림을 그리게 했고 생계를 잇게 했다.”(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아름다움을 찾아서』중에서. 삶과 꿈 발간. 2002년 10월)

실제로 박생광의 트레이드 마크인 울긋불긋한 한국적 색채의 그림은 김 관장 부부가 작가를 돕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박생광은 오랜 시간 그려온 수묵화에서 벗어나 단청 안료를 쓴 강렬한 색의 그림으로 작품 세계를 넓혀나갔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 ‘명성황후’, ‘무당’, ‘무속’, ‘전봉준’과 같은 것들이다.

특히 가로 3.3m, 세로 2m에 달하는 대작 ‘명성황후’는 구상에만 3년, 제작하는 데 1년이 걸린  야심작이었다. 그는 79세에 이 작품을 완성한다. 아마도 말년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면 한국 화단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박생광, 명성황후, 1983년 작. [사진 허유림]

박생광, 명성황후, 1983년 작. [사진 허유림]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서 한 인간과 한 인간이 자아내고 있는 관계의 아름다움이 더욱 존재를 뚜렷하게 한다. 박생광 없이 김이환을 생각할 수 없고 김이환 없이 박생광을 생각할 수 없다.”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아름다움을 찾아서』중에서)

박생광이 작고한 지 10년이 지난 1995년 김이환은 미술사와 미술경영을 공부하기 위해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정확히 말하면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한 박생광을 더 잘 연구하기 위해 떠나는 일본 유학이었다. 반백의 그가 박생광을 제대로 알려면 일본 미술은 물론이고 동양 미술 전반에 관해 알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해당 전공과목뿐 아니라 학부 3, 4학년 미술사 강의를 거의 다 청강했다. 박생광이 원래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라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보고 배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김이환은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운명처럼 이끌린 일이라고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후원에 대한 대가는 그림으로 받아

박생광, 가야금, 113 X 85cm. [중앙포토]

박생광, 가야금, 113 X 85cm. [중앙포토]

비용을 대고 대가는 그림을 받는 식으로 후원했다. 이 때문인지 후원을 명목으로 시세 차익을 노리고 투자한다는 구설에 올랐다. 1984년 개인전 이후 박 작가에게 관심 갖는 화랑이 많아지자 김 관장은 손을 뗐고, 이후 미술관을 열면서 그의 그림들을 사들였다. 대표작 ‘명성황후’는 1990년대 초 압구정 현대아파트 50평짜리 한 채 값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는 2003년 6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몬타나 거리의 한켠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 문화센터에서 박생광 특별전을 열었다. 폭발하는 힘과 아이의 천진난만함, 자유로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박생광의 작품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 중심엔 명성황후가 있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자신의 명성황후를 견줘보고 싶어했던 박생광. 김이환은 기꺼이 사후에도 그런 박생광의 꿈을 후원했다.

김이환 관장은 박생광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4년 『수유리 가는 길』이라는 책을 펴냈다. 박 작가의 삶과 예술을 다룬 책이었다. 그 책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미술관에 관람객이 끊어진 시간 나는 종종 내고 전시실에 홀로 들어간다. 내고의 이 작품 저 작품을 눈으로 한 번씩 쓸고, 맨 나중에 ‘명성황후’ 앞에 가 조용히 마주 선다. 내고는 어김없이 거기 있어 나를 반긴다. 그것이면 되었다.”

박생광이 작고한 후에도 김이환, 신영숙 부부의 후원자 삶은 계속되었다. 통영 출신 전혁림(1915~2010)의 후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혁림은 박생광을 통해 알게 된 통영 출신의 화가였다. 박생광과 전혁림은 한국적 미를 화폭에 풀어놓으며 회화의 전통을 현대적 시각 언어로 재해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인 신영숙도 2012년 전혁림의 작품 활동을 도운 20년 세월을 기록한 『통영 다녀오는 길』을 펴냈다.

전혁림 작품도 전시

2015년 전혁림 탄생 100년 특별기념전 '백년의 꿈' 중 전시장 2층에 마련된 화시전. [중앙포토]

2015년 전혁림 탄생 100년 특별기념전 '백년의 꿈' 중 전시장 2층에 마련된 화시전. [중앙포토]

이영미술관은 전혁림 작가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민족 혼의 화가 박생광’(2004)을 비롯해 ‘108번의 삶과 죽음’(2005), 전혁림 작고 1주기 기념전 ‘나는 전혁림이다’(2011), 전혁림 탄생 100년 특별기념전 ‘백년의 꿈’(2015) 등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들을 개최했다.

이영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박 작가의 작품은 100여점에 달한다. 국내에서 박생광 작가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서로에게 기대며 무한대의 성장을 이뤄 냈다는 것이다. 단순한 후원자와 작가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영 미술관

장소 : 경기도 기흥구 영덕동 55-1
개장 : 10~ 18시(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 성인 9000원, 학생(초중고) 5000원, 어린이(미취학) 3500원
* 박생광과 전혁림 작품은 상설 전시로 관람이 가능하다.

허유림 RP' INSTITUTE. SEOUL 대표 & 아트 컨설턴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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