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눕터뷰]"제주는 제2의 고향" 시카고에서 온 청년농부 도하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여기 단호박이 크게 영글었는걸!”

5월의 어느 봄날.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인근의 작은 밭. 청년들이 열심히 잡초를 뽑고 있다.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어…” 라며 쭈그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에고고….”라는 탄식도 이어진다. 이들의 정체는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모임인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의 젊은 농부들. 그들 사이로 낯선 외국인의 모습이 보인다. 펑퍼짐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야무지게 풀을 뽑는 게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다.

도하리는 미국 시카고에서 제주로 왔다. 3년째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작은 씨앗을 손으로 직접 뿌리며 이웃 어르신들과 '우리는 같다'라는 삶을 꿈꾼다. 장진영 기자

도하리는 미국 시카고에서 제주로 왔다. 3년째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작은 씨앗을 손으로 직접 뿌리며 이웃 어르신들과 '우리는 같다'라는 삶을 꿈꾼다. 장진영 기자

그녀의 이름은 홀리 조이 토마스(Holly Joy Thomas, 25). 미국 시카고에서 왔다. 여기에선 도하리로 불린다. 진짜 제주 농부로 변신 중인 도하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주에서 농부 생활을 한다고?
미국에 있을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한국 사람이었다. 그 친구를 따라 대구 경북대에 교환학생으로 와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했는데 국적에 상관없이 어울리는 문화가 좋았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이성빈 이사장)이 제주도에서 ‘농사지으며 어울림을 만드는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는 제주에서 농부가 되고 싶은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다. 3년째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생활하고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인근에 위치한 밭에서 도하리와 조합 멤버들이 잡초뽑기 작업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인근에 위치한 밭에서 도하리와 조합 멤버들이 잡초뽑기 작업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농사가 낯설지는 않았나?
부모님이 미국에서 농장을 운영하신다. 27만평 규모인데 사과, 복숭아 등을 생산한다. 어릴 때부터 농사의 많은 부분을 몸으로 체험했다. 다만 이곳의 농사 방법이 미국과 많이 달라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어떤 점이 힘들었나?
우리 마을(모슬포)엔 작은 밭이 많다. 밭 경계가 직선이 아닌 곳이 대부분이라 트랙터 같은 기계가 들어오지 못해 모든 일을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첫 농사로 참깨를 했는데 작은 씨앗을 하나씩 직접 뿌렸다. 수확도 마찬가지고. 몸과 손을 써서 일하는 것이 ‘제주 스타일 농사’다.  
누군가는 농부로, 누군가는 여행객으로 이곳을 찾았다. 꿈을 함께 하는 이들이 한곳에 모였다. 왼쪽부터 박훈, 양정민, 도하리, 박송이, 김진우, 임주현. 장진영 기자

누군가는 농부로, 누군가는 여행객으로 이곳을 찾았다. 꿈을 함께 하는 이들이 한곳에 모였다. 왼쪽부터 박훈, 양정민, 도하리, 박송이, 김진우, 임주현. 장진영 기자

마라도 선착창 인근에서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청년들이 직접 운영하는 직판장 '알뜨르 농부시장' 내부. 장진영 기자

마라도 선착창 인근에서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청년들이 직접 운영하는 직판장 '알뜨르 농부시장' 내부. 장진영 기자

지금은 농사가 익숙해졌는지?
1~2년 지나니 손으로 하는게 익숙해졌다. 요즘은 마을 어르신들께 ‘요망지다(농사 잘한다)’라는 말도 듣는다. 지금까지 무, 브로콜리, 유칼립투스, 귤, 마늘 농사 등을 지었다. 이장님이 우리의 농사 선생님이다. 농사를 배워 마을에 품앗이 다니다 얼마 전에 우리만의 밭을 갖게 되었다. 잡초와 돌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이장님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마치 ‘아기밭’ 같았다. 민얼굴을 드러낸 흙 위에 처음 씨앗을 뿌리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도하리가 마을 직판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도하리가 마을 직판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제주라는 공간에 녹아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언어가 가장 힘들었다. 한국말도 어려운데 제주 사투리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멤버들이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께 한글을 가르치는데 거기서 같이 배웠다. 한글 수업이 끝나면 나만을 위한 ‘사투리 특별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어르신들이 약간 ‘츤데레’ 스타일이다. 처음엔 서먹한데 마음이 한 번 열리면 정말 잘해주신다. 얼마 전엔 서귀포 칠십리 축제에서 소리패로 같이 공연하기도 했다. 함께 하면서 ‘우리는 같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협동조합의 청년들은 잡초가 무성한 밭을 '아기밭'을 만들어 씨를 뿌렸다. 장진영 기자

협동조합의 청년들은 잡초가 무성한 밭을 '아기밭'을 만들어 씨를 뿌렸다. 장진영 기자

농부 ‘도하리’의 일과는?
오전 5시 10분쯤 일어나 6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5시쯤까지 밭에서 일한다. 중간중간 식사와 새참도 챙겨 먹는다. 일을 마친 후에는 잠들기 전까지 우리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온라인 마케팅을 한다. 밭일이 없는 날에는 직판장에 나가 판매 활동을 한다.  
직판장내 발랄한 문구들. 장진영 기자

직판장내 발랄한 문구들. 장진영 기자

특별한 프로그램도 하고 있다고?
여기에선 모두가 같은 패턴으로 생활하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이틀 농사일을 하고 숙식을 제공 받을수도 있고, 여행자처럼 머물다 갈 수도 있다. 재밌는 일을 벌여도 된다. 공방을 차려 캔들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인테리어 일을 하던 멤버는 숙소 곳곳을 정비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나는 ‘영어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나와 메이트가 되어 같이 농사짓고, 여행하고 친구처럼 지낸다. 물론 영어만 사용하면서.  
미국에서 대학 재학시절의 도하리. [사진 도하리]

미국에서 대학 재학시절의 도하리. [사진 도하리]

제주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스스로를 '모슬포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현실을 경험했다. 제주는 나의 두 번째 고향이다. 농사는 나에게 익숙한 것이고, 미래를 결정짓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농사를 통해 남을 도우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제주에 와서 많이 성장한 것 같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청년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또, 한류는 K-POP과 드라마밖에 모르는 외국인들한테 진짜 한국인의 생활을 알려주고 싶기도 하다.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제주 스타일로 농사를 짓고 싶다.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은 같은 꿈을 꾸는 청년들이 함께하는 곳이다. [사진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은 같은 꿈을 꾸는 청년들이 함께하는 곳이다. [사진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서귀포 칠십리 축제에 마을 어르신들과 함게 함가한 도하리(윗줄 오른쪽 셋째). [사진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서귀포 칠십리 축제에 마을 어르신들과 함게 함가한 도하리(윗줄 오른쪽 셋째). [사진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가족이 그립지는 않나?
엄마가 내 SNS를 보고 댓글을 남기신다. 넘버원 팬이다. 아빠도 ‘열심히 일하고 그 일을 즐겨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열심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 보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다.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 덕에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도하리는 스스로는 '모슬포 사람'이라고 부른다. 장진영 기자

도하리는 스스로는 '모슬포 사람'이라고 부른다. 장진영 기자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삶에는 많은 길이 존재한다. 가능한 다양한 길을 걷는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과로서의 행복'만을 따라가지는 않으려 한다. 행복은 길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중간에 존재하기도 하니까. 농사를 지으며 씨앗을 심고, 줄기가 자라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은.
농사를 통해 지역주민과 함께하고 싶은 꿈을 갖고 제주로 이주한 청년들이 꾸린 공동체다. 가입 조건은 없으며 일주일에 2일 공동작업(농사 품앗이, 직판장 판매)에 참여하면 숙식이 제공된다. 청년 커뮤니티, 봉사활동, 워킹 홀리데이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꼭 농사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숙박비를 지불하면 게스트하우스처럼 이용할 수도 있다. 현재 외국인 6명을 포함해 2~30대 37명의 청년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눕터뷰

'누워서 하는 인터뷰'의 줄임말로, 인물과 그가 소유한 장비 등을 함께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인터뷰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