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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자리서 1시간씩 떠드는 부장님, 그건 수다폭력이에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35) 

얼마 전 '주폭'이란 단어가 다시 신문의 사회면에 등장했다. 술 '주'자에 사나울 '폭'자를 갖다 붙인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술 마신 뒤 하는 난폭한 행동 또는 사람을 일컫는다. [중앙포토·뉴스1]

얼마 전 '주폭'이란 단어가 다시 신문의 사회면에 등장했다. 술 '주'자에 사나울 '폭'자를 갖다 붙인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술 마신 뒤 하는 난폭한 행동 또는 사람을 일컫는다. [중앙포토·뉴스1]

얼마 전 ‘주폭’이란 단어가 다시 신문의 사회면에 잔뜩 등장했다. ‘술 주(酒)’자에 ‘사나울 폭(暴)’자를 갖다 붙인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술을 마신 뒤 하는 난폭한 행동 또는 사람을 일컫는다.

예전에는 술을 처벌 감경사유로 여기는 시각이 있었는데, 지금 시민들의 반응은 냉랭하기 짝이 없다. 과거 흔하게 쓰던 ‘술이 웬수지’라는 말은 점점 ‘취중본색’이라는 말로 바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주폭 기사에도 ‘강경 처벌하라’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과거보다 사회가 폭력을 인지하는 감수성이 더 발달했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폭력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발달하고 있는 사실 자체는 반갑지만 아직 아쉬운 수준이다. 인식의 사각지대에 놓인 폭력이 여전히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폭력이다. 꼭 욕설을 쓰거나 인신공격을 해야만 언어폭력이 아니다. 상대를 꼼짝없이 옭아매는 끝 모르는 수다도 언어폭력의 한 종류다. 대개는 지위를 이용해 자행된다. 이것을 ‘권력형 수다폭력’이라고 부르자.

지위를 이용한 ‘권력형 수다폭력’

권력형 수다폭력은 회식자리에서 자주 일어난다. 1시간씩 쉬지 않고 떠드는 부장님이 가시면 자기 차례 시작하는 차장님이 있다. 고역은 온통 젊은 사원들의 몫이다. [사진 pixabay]

권력형 수다폭력은 회식자리에서 자주 일어난다. 1시간씩 쉬지 않고 떠드는 부장님이 가시면 자기 차례 시작하는 차장님이 있다. 고역은 온통 젊은 사원들의 몫이다. [사진 pixabay]

권력형 수다폭력은 회식자리에서 자주 일어난다. 1시간씩 쉬지 않고 떠드는 부장님이 있는가 하면, 부장님 가시면 그 정신 이어받아 자기 차례 시작하는 차장님도 있다. 고역은 온통 젊은 사원들의 몫이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연구에 따르면 술을 마시면 세로토닌이, 자기 얘기를 할 때는 도파민이 나온다고 한다. 술 마시면서 떠드는 건 원래 즐거운 일이라는 얘기다. 한데 나 좋자고 다른 이를 괴롭게 만들고 있으니 이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폭력은 근절되어야 한다. 수다폭력도 마찬가지다. 각 계는 빨리 조치를 시작하라.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그런 것처럼 ‘직장내 수다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것도 좋겠다. 30분간 말없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 스트레스의 크기는 말벌에 쏘였을 때의 스트레스와 비슷하다거나 권력형 수다폭력에 시달린 사람들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사례를 알려준다거나 하면 좋겠다(이러한 연구가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

수다폭력 예방을 위한 조직적인 조치가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다. 전문가들이 해결책을 고심하는 동안 우리는 짧게 말하는 방법을 공부하자. 시 소개를 맡은 자로서는 아무래도 시의 예를 들고 싶다. 짧은 시를 말할 때 흔히 인용되는 시조나 하이쿠(俳句) 말고도 자유롭게 쓰인 단형시가 얼마든지 있다. 시인 이시영의 작품들이 좋은 예다.

이 밤에 누가 있어 들어줄까
빗방울 하나가 수직으로 곧게 떨어져
지상을 파르랗게 물들이는 모습을
-이시영, 「파문」전문.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1997)』에 수록

이 시에서 느껴지는 심상은 적막이다. 그 적막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화자의 자세가 자못 진지하여 경건하기까지 하다. 시인은 적막이란 단어 없이 깊은 적막을 그려내고 있다. 짧은 시 뒤의 여운이 수면 위의 파문처럼 남는다. 한편 더 읽는다.

아직 이른 봄 상여 한 채가 조용한 미소로 고향 산천을
찾아드니

어여 오게 어여와 제일 먼저 반색을 하고 달려나오는
외로운 무덤이 있다
-「상봉」전문. 시집 『은빛 호각(2003)』에 수록

‘상봉’이란 대저 산 것과 산 것이 만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허나 죽은 자들의 만남에서 반가운 상봉을 읽어내니 과연 혹자의 말처럼 시인이란 결국 섬세한 관찰자를 일컫는 말인가 한다.

1949년에 태어난 이시영 시인은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로, 월간문학에서는 시로 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중앙포토]

1949년에 태어난 이시영 시인은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로, 월간문학에서는 시로 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중앙포토]

1949년에 태어난 이시영 시인은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로, 월간문학에서는 시로 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정지용 문학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말은 짧게, 생각은 길게

이시영은 짧게 쓴다. 짧게 쓰기 위해서 그는 더 많이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수다폭력을 자행하는 이들이 모두 본받아야 할 자세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올여름엔 말수를 좀 줄이자. 줄여서 좋을 건 대폭 줄이고, 좋은 것만 늘려 저녁 식사는 작되 꿈은 크게, 말은 짧되 생각은 길게, 술잔은 차되, 포옹은 뜨겁게 하며 살아가자. 내친김에 한편 더 읽는다.

건너편 창가에 비둘기가 아슬아슬 걸터앉는다
아이가 작은 주먹을 펴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여주고 있다.
바람이 불어온다.
- 「이 세계」 전문.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1997)』에 수록

짐승을 먹이는 아이의 손길은 순진무구하다. 그것은 산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연민과 순수한 호기심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는 폭력과 비슷한 어떠한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바람이 불어온다. 비록 호위호식은 없으나 태평성대한 풍경. 시인은 이 세계가 이러한 장면들로 채워지길 바랐나 보다. 담담한 제목에서 그와 같은 염원을 읽어낼 수 있다.

보라, 어떠한 사람은 단 3줄로 이루어진 글을 통해 자기가 바라는 세계를 그려 내기도 한다. 그 짧은 글을 위해, 시인은 긴 생각을 선행했을 것이다. 길고 의미 없는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에는 자못 선행(善行)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선행(先行)이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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