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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른셋 이후에는 신곡 유행가를 듣지 않게 될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34)

'더는 신곡을 찾아 듣지 않을 때' 우리는 나이 들어감을 실감한다. 사람은 보통 33살부터 새로운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 pixabay]

'더는 신곡을 찾아 듣지 않을 때' 우리는 나이 들어감을 실감한다. 사람은 보통 33살부터 새로운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 pixabay]

부쩍 이마가 넓어지고 있다며 나이 들고 있음을 실감한다는 사람 있다. 계단 내려가는 일이 전처럼 수월하지 않아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사랑 때문에 잠 못 이루다는 후배의 고민을 들으며 ‘청춘이라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보고 그랬다는 사람도 있다. 아마 그 밖에도 나이 들어감을 실감하는 순간은 많을 것이다. 한데 이런 종류는 어떤가. ‘더는 신곡을 찾아 듣지 않을 때.’ 어째, 조금 공감이 되는지?

사람은 보통 33살부터 새로운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한다. 음반 산업계가 왜 계속해서 10대 소비자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째서 이런 걸까, 라고 생각하며 플레이리스트를 열어 본다. 나도 어김없다. 박효신의 ‘동경’이라니, 이 땅에 태극전사와 히딩크의 역사가 쓰이기도 전의 노래라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주변에 이런 얘기를 하니 반응이 두 가지로 갈렸다. “당연하잖아.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신곡이야”라고 하는 부류와 “박효신 좋지. 오늘, 노래방?”이라고 하는 부류였다. 나는 노래방에 가서 그들이 부르는 김광석을 들으며,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적어도 음악평론가를 꿈꾸며 밤새 CD를 듣던 시절로부터는, 참 많은 시간이 지났다. 왜 신곡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을까? 의외로 그 답을, 한 편의 시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지 못했다
너의 얼굴은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던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이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서효인, 『여수』 전문

전남 여수 오동도 동백. [뉴시스]

전남 여수 오동도 동백. [뉴시스]

시인은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여수 사람. 그래서 여수까지 사랑하게 됐다. 우리가 무언가를 좋아할 때는 대개 이런 식이다. 사연이 깃든 것이라 어쩌지 못한다. 여수에 사는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한 이에게, 여수는 여수 그 이상이 된다. 그는 아마 오랫동안 ‘여수’라는 말을 들을 때 태평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노래도 마찬가지다. 그게 무엇이든 사연이 깃든 노래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입대 전 만취한 친구들과 서로의 어깨 붙들고 ‘이등병의 편지’ 안 불러 본 청춘이 어디 있을 것이며 고조된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안재욱의 ‘친구’까지 이어 부르다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은 청춘 어디 있을 것이냔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절 친구들과 부르는 ‘이등병의 편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무리 곡은 여전히 안재욱이다. 신곡 같은 건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다. 내게 박효신의 ‘동경’이란 풋사랑을 앓고 나서 즐겨 듣던 곡이었다. 일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건대 앞으로는 풋사랑 때문에 앓을 일도, 그런 식으로 어떤 신곡으로 좋아하게 되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나도 그런 식으로 나이 듦을 실감하고 있다.

여수를 사랑한 시인 서효인은 198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2006년에 시인이 되었고 시집 『여수』를 비롯한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냈다. [중앙포토]

여수를 사랑한 시인 서효인은 198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2006년에 시인이 되었고 시집 『여수』를 비롯한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냈다. [중앙포토]

여수를 사랑한 시인 서효인은 198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2006년에 시인이 되었고 시집 『여수』를 비롯한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냈다. 오래된 야구팬이라면 동명의 야구선수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실 텐데, 서 시인도 야구 사랑이 대단한 사람이다. 궁금하신 분은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를 통해 감각적인 젊은 시인이 야구 썰(?)을 풀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실 수 있다.

야구책을 낼 무렵 해서 김수영 문학상을 받더니, 작년에는 천상병 시 문학상까지 받았다. 그는 글을 잘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엮기도 한다.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기도 하는 그는 2016년 ‘Littor(릿터)’라는 젊은 감각의 문예지를 만들었다. 시종일관 심각한 말투를 유지하느라 넓은 독자에게 다가가는 데 실패해왔던 기성 문예지와 달리 ‘릿터’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세상에 나왔다. 첫 호에서 아이돌 인터뷰를 실은 것이 그 예다.

왕성하게 글 쓰고 엮는 것을 보니 서효인은 아직 젊은 시인이다. 그런 그라면 여전히 신곡을 듣고 있을 것이다. 짐작이 맞을까 검색해보니 그는 신곡을 듣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노래와 가수들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오늘은 ‘서효인의 가요 대잔치’라고 이름 붙은 그의 음악 칼럼 읽으며, 안티에이징 해야겠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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