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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품어가도 반길 이 없다, 박인로의 풍수지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33)

과거 어느 방송에서 부모님이 자식에게 가장 바라는 건 전화통화라는 답이 나왔다. 자식들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사진 unsplash]

과거 어느 방송에서 부모님이 자식에게 가장 바라는 건 전화통화라는 답이 나왔다. 자식들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사진 unsplash]

과거 어느 예능 방송에서, “부모님이 자식에게 가장 바라는 건?”이라는 질문이 나왔다. 젊은 패널들은 용돈 드리기, 여행 보내 드리기, 함께 외식하기 등 여러 가지 답을 내놓았는데, 정답은 예상외로 ‘전화통화’였다. 뭘 거창하게 하지 않더라도 자식들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시간이 지나 필자, 삼십 대 중반이 되었다. 결혼도 하고 분가도 했다. 그리고 의지와는 정반대로 점점 불효의 길을 걷고 있다. 말하자면 전화조차 자주 못 드리고 있다. 변명할 기회를 얻는다면 ‘일이 너무 바빠서’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 나는 점점 더 바빠져 전화 드리겠다는 다짐을 자꾸 잊고, 은퇴하신 부모님은 시간이 많아 전화를 기다리는 순간이 늘어나니 이 얼마나 야속한 타이밍인지!

최근에는 밥 지어줄 테니 놀러 오라는 어머니의 초대를 몇 번이나 거절해야 했다. 녹초가 된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였다. 이번 일만 끝나면 모시고 근교로 놀러 가야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일이란 밀려오는 파도와도 같아서, 부모님은 자꾸 다음 순위로 밀린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때를 놓치고 말까 봐 겁이 나기도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옛시조 중에도 그런 마음을 그려낸 작품이 하나 있다.

반중 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설워 하나이다
-박인로, 조홍시가

박인로의 조홍시가는 탁자 위의 붉은 감이 참 고와 보여 품에 넣어 갔으면 하는데 가져가더라도 반겨줄 사람이 없으니 슬프다는 얘기이다. [사진 pixabay]

박인로의 조홍시가는 탁자 위의 붉은 감이 참 고와 보여 품에 넣어 갔으면 하는데 가져가더라도 반겨줄 사람이 없으니 슬프다는 얘기이다. [사진 pixabay]

반중(盤中)이란 소반 한가운데라는 뜻이다. 즉 탁자 위의 붉은 감이 참 고와 보여 비록 유자는 아닐지언정 품속에 넣어 갔으면 좋은데, 가져가더라도 반겨줄 사람이 없으니 슬프다는 얘기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박인로는 원래 무인이었다.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훗날 독서와 수행을 통해 문인으로서도 두각을 드러내었다.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니 요샛말로 하면 엄친아다. 그 엄친아도 부모의 부재 앞에서 태연하지 못한 걸 보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말 그대로, 계시는 동안 잘해야겠다.

그나저나 유자 얘기는 뭘까.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다. 오나라의 육적이 어릴 때 제 아버지와 함께 원술을 만났다.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기 직전이니, 그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 거물급 인사 앞에서 어린 육적이 당돌한 짓을 한다. 먹으라고 내준 유자를 몇 개 품속에 숨긴 것이다.

그런데 나가면서 인사를 하다가 그만 품속의 유자를 떨어뜨리고 만다. 원술이 어찌하여 먹으라고 준 유자를 품에 넣었느냐고 묻자, 육적은 욕귀유모(欲歸遺母), 즉 집에 가서 어머니께 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원술이 육적의 효심에 감탄하여 유자를 더 싸주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육적회귤(陸績懷橘)로 전해지며, 현재는 지극한 효성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박인로의 시조는 이 육적회귤을 빗댄 것이다.

육적회귤은 지극한 효성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박인로의 시조는 이 육적회귤을 빗댄 것이다. [중앙포토]

육적회귤은 지극한 효성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박인로의 시조는 이 육적회귤을 빗댄 것이다. [중앙포토]

우리에게는 바쁜 날 지나가고 탁자 위 감이 눈에 들어오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부모님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때를 놓친 효심일지도 모른다. 결심이 설 무렵엔 이미 때가 지났다는 가혹한 함정들이 인생에는 여럿 놓여 있다는 걸, 나는 살면서 배웠다.

며칠 전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여전히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하니”라면서 서운해하신다. “어제도 카톡 했잖아요”라고 하니, 그런 건 쳐주지 않는단다. 이제 알겠다. 부모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은 최소가 전화통화다. 앞으로는 점심시간 때 회사 근처 산책이라도 하며 전화를 걸어야겠다.

누군가 함께 산책하자며 방해를 할 참이면, 욕화부모(欲話父母), 즉 부모님과 대화를 욕망함, 이라고 말한 뒤 자리를 피해야겠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면? 글쎄. 이번 주 '전새벽의 시집읽기'에서 찾아 읽어보라고 은근슬쩍 글 홍보나 해야겠다. 아들의 글이 많이 읽힌다면, 그 또한 부모님이 좋아하실 일일 테니 말이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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