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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1998년과 너무 다른 북 미사일 한·미·일 공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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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장면 1=1998년 8월 31일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하자 다음날인 9월 1일 천용택 국방부 장관이 일본으로 날아갔다.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방위청 장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에 협력하는 문제와 한.일 합동군사 훈련 실시가 논의됐다. 당시 두 장관의 만남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전에 이미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국내외에 한.일 양국이 안보 문제에 긴밀하게 공동대응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틀 뒤인 3일엔 홍순영 외교부 장관이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외상과 만났다. 홍 장관은 일본의 북한 경수로 사업비 분담 유보 방침에 대해 "일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밝히며 양국의 우호를 다졌다. 그 자리에서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 개최가 결정됐고, 3주 뒤인 9월 24일 뉴욕에서 실제로 회담이 열렸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 온건파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외교관계를 갖고 있었다. 미사일 사태를 맞아 한.미.일 3국 간엔 협의가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이뤄졌다.

북한이 미사일이 아닌 위성을 발사했다고 98년 9월 4일 주장하자 외교부는 다음날인 5일 한.미.일 고위 실무협의 등의 네 가지 조치를 발표하며 "한.미.일 공조에 흔들림이 없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김대중 대통령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청와대에서 만나 "한.미.일 3국은 긴밀한 협조 속에 한국과 미국을 시험하는 북한의 정책에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 외교전문가는 "98년 9월의 잇따른 장관급 외교는 실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한.일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국장급 정보교환 창구가 마련됐고,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선 한국의 미사일 개발 제한 문제가 논의됐다는 것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당시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닥친 직후라 국제 신인도 하락으로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될 우려가 있었는데 미.일과의 긴밀한 협력을 보여줘 국제 사회를 안심시키는 효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장면 2=2006년 7월 5일 새벽 북한이 대포동 2호를 포함해 6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자 일본의 누카가 방위청 장관은 즉각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카가 장관은 98년 천용택 장관을 만났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정보수집과 대응에 적극 협력하기로 다짐했다. 그런 누카가 장관이 지금 한국 쪽에는 연락이 없다. 장관급 접촉은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미.일.중.러 외교부 장관에게 5일 전화 통화한 게 전부다. 한.미.일 3국 장관이 만날 계획도 아직 없다. 8년 전 미사일 사건 때와 양상이 다르다. 한국의 전통적 안보 틀인 '한.미.일 3각 공조체제'가 부실해졌다는 우려가 나오는 게 이 때문이다. 국회에선 "우리 정부가 미국.일본과의 정보 교류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외교부는 이번 사건이 발생한 뒤 미.일과의 공조가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대포동 2호 발사 때 방미 중이던 송민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등 미 고위 관리와 충분히 협의했고, 7일 방한하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와 반 장관이 현안을 심도있게 논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다른 외교전문가는 "북한과의 11일 장관급 회담은 예정대로 추진하면서 일본과는 장관급 접촉조차 시도하지 않는 게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일 수 있다"며 "미사일 발사 초기 대응이 부실했던 것처럼 사후 대응도 그다지 기민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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