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경애 묘지명’
(1148년).
70×33×3㎝. 16㎏.
바로 묘지명(墓誌銘)이다. 무덤 앞에 세운 묘비와 다르다. 망자(亡者)의 일생.가족관계.사회활동 등을 적어 무덤 안에 넣는 판석(板石)이다. 한국에 묘비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고려시대 초. 중국의 영향을 받은 당대 왕족.승려 등 당대 지배층 사이에 일종의 '상례(喪禮)'로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 묘지명은 문화적 의미가 크다. 고려청자.불화(佛畵)로 유명했지만 생활상을 일러주는 전적(典籍).유물은 별로 없는 고려를 '복원'하는 재료가 된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의 묘지명은 총 325점.'고려묘지명집성'을 냈던 김용선 한림대 교수는 "여성의 생애를 다룬 묘지명도 50여 개에 이른다"며 "묘지명은 고려의 여성사.서예사.미술사 등의 연구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 묘지명'이 11일~8월 27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총 70여 점의 유물이 나온다. 유교를 수용하면서도 불교를 숭상하고, 재산상속에서 남과 여의 차이가 없었던 '다이내믹 고려'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리다.
일례로 고려시대는 조선시대보다 '우먼 파워'가 강했다. 결혼한 남성은 아이들이 클 때까지 처가에서 사는 게 관례였다. 여성이 호주(戶主)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고려 중기 문신이었던 이승장(1137~1191)의 묘지명을 보면 자녀교육에서도 여성의 '발언권'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혼했던 그의 어머니는 새 아버지가 가난을 이유로 그에 대한 교육에 소홀하자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보겠느냐"라고 항변한 것으로 적혀있다. 남편이 하급관료일 때 동분서주하며 가정을 이끌었던 조강지처(고려 중기 문신 최누백의 아내 염경애)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묘지명도 전시된다.
박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