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려의 여자 '목소리'가 컸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염경애 묘지명’
(1148년).
70×33×3㎝. 16㎏.

겉보기에는 흔한 돌덩어리다. 국보도, 보물도 아니다. 다른 돌과 다르다면 표면에 글자가 새겨져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파고들면 각별한 뜻이 담겨있다. 특정 시대의 정치.사회.경제.문화를 살펴보는 '바로미터'가 된다.

바로 묘지명(墓誌銘)이다. 무덤 앞에 세운 묘비와 다르다. 망자(亡者)의 일생.가족관계.사회활동 등을 적어 무덤 안에 넣는 판석(板石)이다. 한국에 묘비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고려시대 초. 중국의 영향을 받은 당대 왕족.승려 등 당대 지배층 사이에 일종의 '상례(喪禮)'로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 묘지명은 문화적 의미가 크다. 고려청자.불화(佛畵)로 유명했지만 생활상을 일러주는 전적(典籍).유물은 별로 없는 고려를 '복원'하는 재료가 된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의 묘지명은 총 325점.'고려묘지명집성'을 냈던 김용선 한림대 교수는 "여성의 생애를 다룬 묘지명도 50여 개에 이른다"며 "묘지명은 고려의 여성사.서예사.미술사 등의 연구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 묘지명'이 11일~8월 27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총 70여 점의 유물이 나온다. 유교를 수용하면서도 불교를 숭상하고, 재산상속에서 남과 여의 차이가 없었던 '다이내믹 고려'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리다.

일례로 고려시대는 조선시대보다 '우먼 파워'가 강했다. 결혼한 남성은 아이들이 클 때까지 처가에서 사는 게 관례였다. 여성이 호주(戶主)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고려 중기 문신이었던 이승장(1137~1191)의 묘지명을 보면 자녀교육에서도 여성의 '발언권'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혼했던 그의 어머니는 새 아버지가 가난을 이유로 그에 대한 교육에 소홀하자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보겠느냐"라고 항변한 것으로 적혀있다. 남편이 하급관료일 때 동분서주하며 가정을 이끌었던 조강지처(고려 중기 문신 최누백의 아내 염경애)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묘지명도 전시된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