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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400억 빌딩만 의미있나? 1억 생명보험도 값진 유산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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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거주하는 주선용(67·여) 씨는 대학병원 원목실 전도사로 27년간 일하다 2013년 은퇴했다. 28세 때 장교였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들·딸을 혼자 키웠다. 그는 오래전 가입한 5000만 원짜리 생명보험에다 몇 년 전 새로 가입한 적금 5000만원까지 생명보험으로 전환하면서 1억원짜리 보험증서의 피보험자(수혜자)를 자녀가 아닌 자선단체(기아대책)로 지정했다. '100세 시대'라는데 상대적으로 이른 60대에 유산기부를 결심한 이유를 물어봤더니 "한 살이라도 일찍 기부하면 그만큼 기쁨을 가불하는 셈이라 더 오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손주 넷이 '유산기부를 실천한 훌륭한 우리 할머니'라고 자랑해서 기쁘다. 금전을 물려주는 것보다 나눔의 삶을 살고 싶어 한 부모의 뜻을 자녀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진정으로 소중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생명보험 증서를 자선단체에 유산기부한 주선용(67·사진 가운데)씨가 아들·딸, 손주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주씨는 "부모가 어떤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자녀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유산"이라고 말했다.

생명보험 증서를 자선단체에 유산기부한 주선용(67·사진 가운데)씨가 아들·딸, 손주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주씨는 "부모가 어떤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자녀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유산"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권에 거주하는 50대 미혼 여성 A씨는 부모님이 일찍 별세하는 바람에 춥고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5000원짜리 자장면 사 먹을 돈을 아껴가며 악착같이 저축해 매입한 서울 요지의 아파트 한 채를 4년 전 시중 은행의 '유언 대용 신탁'을 통해 자선단체인 월드비전에 기부했다. 유산기부를 약속할 당시 8억원짜리였던 아파트는 최근 18억원을 호가한다. 기부 약정 시점보다 집값이 10억원이나 올랐는데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기부 자산의 가치가 오른 만큼 그대로 기부하는 것이 당초 취지에 맞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뜻에 따라 유산기부액의 50%는 사후에 국내 결식아동 돕기 사업에 쓰이고, 나머지 50%는 해외 보건영양 사업에 쓰도록 사용처가 구체적으로 정해졌다. A씨는 "밥 먹고 사는 친인척에게 유산을 물려 줘봤자 벤츠 타고 골프 치는 것 이상 뭘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유산기부 후진국'을 바꿔보려는 사람들 # 기부의향 54.5% 실제 기부 0.5% #"한국 유산기부 문화 아직 일천해" #법정·지정 기부금 혜택 차별 문제 #상속법 개정, 기부연금 도입 필요

 유산기부, 액수와 방법 제한 없어
 이런 훌륭한 유산기부자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유산기부 문화 측면에서 후진국이다. 전체 기부금(2016년 기준 개인·법인 기부금 총액은 12조 8685억원) 중에서 유산기부 비중은 0.5% 미만이다. 이 비율이 각각 8%와 25%인 미국과 영국은 유산기부 문화 선진국으로 꼽힌다. 미국과 영국이 유산기부 선진국이 된 배경에는 부자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왼쪽)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오른쪽)가 미국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해서웨이 주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미국의 유산기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왼쪽)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오른쪽)가 미국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해서웨이 주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미국의 유산기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2010년 6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등 미국의 억만장자 40명이 유산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기부 서약(The giving pledge) 운동'을 시작했다.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자는 취지였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내 가족이 행복하려면 세상이 좋아져야 한다.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라면서 유산을 기부하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영국에서는 민간과 정부의 손발이 잘 맞는다. 2011년 11월 금융 컨설팅업체 핀스버리 창업자 롤랜드 러드는 영국인 10%가 자발적으로 유산의 10% 기부를 서약하는 유산기부 캠페인 '레거시(Legacy) 10'을 제창했다. 영국에서 32만5000파운드(약 5억원) 이상을 상속할 경우 세율이 40%이지만, 정부는 유산의 10% 이상을 기부할 경우 상속세를 36%로 낮춰준다. 영국은 9월 13일을 '국제 유산기부의 날'로 지정해 기부를 장려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아직도 유산기부에 대해 모든 재산을 기부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유산기부는 액수와 방법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생전에 재산의 일부라도 능력껏 기부하면 된다.

조용근(사진 오른쪽) 다일공동체 밥퍼 명예본부장은 3월에 별세한 장모가 남긴 쪽지에서 유산기부 뜻을 확인하고 장모가 남긴 돈 450만원에다 유가족의 550만원을 합쳐 1000만원을 다일공동체게 기부했다.

조용근(사진 오른쪽) 다일공동체 밥퍼 명예본부장은 3월에 별세한 장모가 남긴 쪽지에서 유산기부 뜻을 확인하고 장모가 남긴 돈 450만원에다 유가족의 550만원을 합쳐 1000만원을 다일공동체게 기부했다.

 조용근 다일공동체 밥퍼 명예본부장 가족의 사례를 보자. 장모 신은옥(1929년 생) 여사가 지난 3월 별세했는데 유가족은 유품을 정리하다 깜짝 놀랐다. "통장에 남은 돈(450만원)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부하라"는 고인의 쪽지를 발견해서다. 고인의 유산기부 뜻에 따라 유가족은 550만원을 보태 지난 8일 1000만원을 다일공동체에 기부했다. 액수를 떠나 유산기부의 숭고한 취지가 사후에 살아난 경우다.

 미국·일본처럼 기부금 공제해줘야 

 윤영호 서울의대 교수가 지난해 만 20세 이상, 80세 미만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유산기부 인식을 조사했더니 54.5%가 "기부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높은 기부 의향(54.5%)과 실제 기부율(0.5% 미만) 차이를 만든 요인으로 전문가들은 현행법과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상신 서울시립대 세무전문대학원 교수는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해서는 세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생전기부에 공제 혜택을 주듯이 유산기부에 대해서도 미국·일본처럼 기부금 공제를 해줘야 한다"며 "상속세는 전체 세수의 2%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속·증여세가 일부 줄더라도 유산기부를 통한 공익재산이 커지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라고 말했다.

유산기부 캠페인을 추진중인 이일하 굿네이버스 이사장(오른쪽)과 양진옥 회장.  장세정 기자

유산기부 캠페인을 추진중인 이일하 굿네이버스 이사장(오른쪽)과 양진옥 회장. 장세정 기자

 이일하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이사장(굿네이버스 이사장)은 유산기부 활성화 방안에 대해 "법정기부금단체는 소득금액의 100%를 세액공제해주면서 지정기부금단체는 30% 범위에서만 공제해주는 것은 명백한 기부 차별"이라며 "선진국처럼 세액공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최근엔 한국에서도 유산기부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지난 4월 22일 국회에서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한 입법 과제 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영국처럼 공익재단 등에 기부하는 경우 잔여 상속재산에 대해 인하된 상속세율을 적용하고 ^민법상 유류분(遺留分·상속 재산 일부를 상속인이 자기 몫으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제도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만큼 시대 변화에 맞게 개선하고 ^주택연금처럼 기부연금제도를 도입하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유언장 작성 절차를 간소화하자는 등 다양한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국회 기부문화선진화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유산기부는 국가가 세금으로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복지 사각지대를 줄여주기에 장려해야 한다. 유산기부에 걸림돌이 되는 법 개정안을 이르면 6월에 발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재산 물려준다고 자식 잘되나"

 유산기부는 부모와 자녀가 미리 상의하고 공감 단계를 거치는 것이 가족 불화나 갈등을 줄이는 방법이다. 고인의 생전 유지를 잘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27년간 봉사원으로 활동한 고 문복남 여사가 기부한 상가건물을 주민들이 살펴보고 있다. 장세정 기자

27년간 봉사원으로 활동한 고 문복남 여사가 기부한 상가건물을 주민들이 살펴보고 있다. 장세정 기자

 서울 강북구 번동 북부시장 근처에 있는 3층 상가빌딩은 27년간 적십자 봉사원으로 활동한 고 문복남(1937년생) 여사가 유산 기부한 것이다. 교육을 중시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유가족은 2004년 9월 장학회를 만들었고 200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 171명에게 2억4303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다. '형호·안나 장학회'에서 장학위원으로 봉사하는 딸 김민주(51)씨는 "어릴 때 부모님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걸 보고 '나에게 용돈이나 좀 더 주시지'라며 푸념하기도 했다"면서 "부질없다며 연명 치료도 거부하신 어머니가 '기부한 유산은 1원 한 푼도 손대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하셨고 그 뜻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걸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 가족의 릴레이 유산기부 사례도 눈여겨 볼만하다. 김 교수의 모친 고 설순희(1931년생) 여사는 2015년 7월 노후자금 1억원을 기아대책에 유산기부했고 이 과정에서 1남 4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2016년 모친이 별세하자 1억원으로 카메룬 레인보우 초등학교에 2층짜리 건물을 지어줬다. 김 교수는 "기아대책 측이 어머니 장례식장에 '기아대책 유산기부 1호 설순희 후원자'라는 입간판을 세워주셨고, 이를 본 조문객들이 '훌륭한 어머니를 두셨다'고 칭찬해주셔서 뿌듯했다"고 말했다.

자선단체인 기아대책은 김영걸 카이스트 교수의 모친상 때 '유산기부 1호'였던 고 설순희 여사의 뜻을 기리며 상가 입구에 입간판을 세워줬다. 조문객들은 "훌륭한 어머니를 두셨다"며 유가족을 칭찬했다.

자선단체인 기아대책은 김영걸 카이스트 교수의 모친상 때 '유산기부 1호'였던 고 설순희 여사의 뜻을 기리며 상가 입구에 입간판을 세워줬다. 조문객들은 "훌륭한 어머니를 두셨다"며 유가족을 칭찬했다.

 김 교수는 어머니 1주기 때 아내 및 딸 둘과 상의해 1억원을 유산기부했다. 이어 김 교수의 여동생(김선희 매일유업 대표)도 지난 3월 어머니 3주기 때 카메룬 초등학교에 1억원을 기부했다. 어머니가 뿌린 유산기부의 씨앗이 자녀들의 마음을 움직여 릴레이로 꽃핀 사례다.
 과일 장사로 평생 모은 400억원을 지난해 10월 고려대에 기부한 양영애(84) 할머니는 두고두고 울림이 있는 말을 남겼다. "어렵게 모은 재산인데 나 죽고 나서 그냥 흩어지면 슬프잖아. 돈이라는 게 자기가 힘들여 벌지 않으면 의미 없는 거야. 재산 물려준다고 자식들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자식 망치는 거지. (유산기부를 했으니) 이젠 내가 죽어도 고생하며 살아온 보람이 남게 되잖아. 정말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과일 장사로 번 400억원을 고려대에 유산기부한 양영애(84) 할머니는 "재산 물려준다고 자식들이 잘되는 것이 아니다. (유산기부는) 내가 정말 제일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과일 장사로 번 400억원을 고려대에 유산기부한 양영애(84) 할머니는 "재산 물려준다고 자식들이 잘되는 것이 아니다. (유산기부는) 내가 정말 제일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박규민 인턴기자가 이 기사의 영상 편집작업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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