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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대학로에 몰려나온 '영 페미'들의 '불편한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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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6일 서울 대학로에 몰려나온 2만2000명의 영페미들이 경찰의 몰카 편파 수사를 규탄하며 4시간 동안 아스팔트에 앉아 시위를 했다. 이들은 몰카에 대한 정부의 근본 대책을 촉구했다. 장세정 기자

지난 6일 서울 대학로에 몰려나온 2만2000명의 영페미들이 경찰의 몰카 편파 수사를 규탄하며 4시간 동안 아스팔트에 앉아 시위를 했다. 이들은 몰카에 대한 정부의 근본 대책을 촉구했다. 장세정 기자

불법촬영(몰카) 범죄 때문에 한국의 '10·20 세대' 젊은 여자들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났다. 이른바 '영 페미'(젊은 페미니스트)들의 '화염과 분노' 분출 대상은 '한남'들이다.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비하해 부르는 여자들의 눈에 한국 남자들은 여자를 몰래 찍고 훔쳐보고 즐기는 잠재적 성범죄자로 분류된다.
 당초 여심(女心)에 불을 지른 계기는 지난달 '홍대 미대 누드 촬영' 사건이다. 남자 모델의 나체 사진을 동료 여자 모델(25)이 찍어 유출해 구속된 사건이다. "피해자가 남자라서 경찰이 피해자가 여자일 때보다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했다"며 여자들은 성차별 수사라고 반발했다. 그래서 남자 경찰과 경찰청장도 영 페미의 성토 대상이 됐다.

영 페미들이 대학로 몰카 규탄 시위 현장에 들고 나온 시위 구호.

영 페미들이 대학로 몰카 규탄 시위 현장에 들고 나온 시위 구호.

 연초 한국 사회를 강타한 '미투 운동'의 여세를 몰아 인터넷 공간에서 경찰의 편파 수사를 규탄하던 여자들은 급기야 거리로 계속 쏟아져나온다. 5월 19일 1차 시위(1만2000명), 6월 9일 2차 시위(2만2000명)에 이어 다음 달 7일 3차 시위(3만명 예상)가 예고된 상태다.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할 수 있다"는 영 페미들의 해방구 같은 대학로 시위 현장을 '꼰대 급' 남자 기자가 겁도 없이 가봤다.
 토요일이던 지난 9일 오후 2시 30분 지하철 4호선 대학로 역 2번 출구. 지하철 승강장에서부터 붉은 물결이 넘쳐났다. 옷부터 마스크·모자·가방·구두·운동화·스카프까지 붉은색으로 차려입은 10·20세대 여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의 사사건건 #불법 촬영에 분노한 여성들 #7월7일 대학로 3차 시위 예고 #폭염에도 아스팔트 4시간 앉아 #"몰카 삭제, 2차가해 처벌" 촉구 #불안감 덜어 줄 안전대책 절실 #차별철폐 외치면서 남성혐오도 #

지난 9일 서울 대학로에서 '불법촬영 성 편파수사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 페미들. 최정동 기자

지난 9일 서울 대학로에서 '불법촬영 성 편파수사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 페미들. 최정동 기자

 기자는 젊은 후배 여기자들과 똑같이 현장에서 취재 등록을 한 뒤 'press(보도)' 완장을 차야 했다. 전두환 시절에나 있었던 '보도 지침'도 받았다. "경찰통제선(폴리스 라인) 안쪽 시위 현장에는 여자 취재진만 진입할 수 있다. 개별 시위자나 집회 스태프에게 인터뷰는 금지된다."
 남자 기자 차별이 심했다. 특히 집회 후반부에 6명의 여자가 집단 삭발할 때 여기자들만 근접 촬영이 허용됐다. 남자 기자에게도 원거리 촬영은 허용됐지만 영 페미들은 수시로 "찍지 마"라며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기자 생활 25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남자라는 이유로 이처럼 잠재적 범죄자 취급당하며 취재 현장에서 성적 한계를 절감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영 페미들이 대학로 시위 현장에 들고 나온 몰카 비판 팻말.

영 페미들이 대학로 시위 현장에 들고 나온 몰카 비판 팻말.

 오후 3시. 시위 주최 측의 한 여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카랑카랑 외쳤다. "지난달 19일 1차 시위 이후 (우리의 요구에 대한) 청와대 답변이 부실했다. (편파 수사 지적에 대해) 검·경은 변명만 늘어놓았다. 여성 역시 동등한 국민이며 사람이다. 불법 촬영과 성범죄를 규탄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의 용기를 보여줍시다."
 30도가 넘는 초여름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20 여자들이 3~4시간이나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목이 터지라 구호를 외쳤다. 이것만으로도 이들의 진정성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불법 촬영하면) 여성 유죄, 남성 무죄", "남자만 국민이냐 여자도 국민이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My life is not your porn)."
 집회는 불법 촬영 피해자 추모 묵념으로 이어졌다. 진행자는 "더는 불법 촬영으로 여성들이 희생되지 않게 해야 한다. 수사 원칙 무시하는 사법 불평등 규탄한다"고 외쳤다.

영 페미들은 "나(여성)의 일상의 너(남성)의 포르노가 아니다"고 외쳤다.

영 페미들은 "나(여성)의 일상의 너(남성)의 포르노가 아니다"고 외쳤다.

 미리 신청한 22명의 시위 참가자들이 무대 위로 한명씩 나오더니 주최 측이 준비한 구호를 반복해 선창했다. 약 2시간 동안 22명이 선창하고 2만2000명이 따라 외쳤다.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우리는 편파 수사를 규탄한다. 편파 수사 부인하는 이철성(경찰청장)은 사퇴하라. 몰카 찍는 놈도, 올린 놈도, 보는 놈도 구속수사 엄중 처벌. 담뱃갑·물병·차 열쇠·안경 몰카, 피해자 죽이는 몰카 판매 규제하라."
 이들의 핵심 구호를 자세히 뜯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많았지만, 황당한 요구도 적지 않았다. '몰카 신고해도 남자 경찰이 수사 안 해준다'고 불신하는 여자들은 현재 약 1 대 9인 여경 대 남경 비율을 9 대 1로 만들라고 요구했다. 9 대 1 요구는 비현실적이지만, 여경 인력 증원은 검토할만해 보였다.

몰카 수사를 편파적으로 했다며 영 페미들이 사퇴를 촉구한 이철성 경찰청장. 6월말이 임기다.[연합뉴스]

몰카 수사를 편파적으로 했다며 영 페미들이 사퇴를 촉구한 이철성 경찰청장. 6월말이 임기다.[연합뉴스]

 특히 유포 몰카 삭제나 2차 가해 처벌 요구는 경찰 당국이 꼭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었다. 그러나 몰카 판매 자체를 규제하라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전문가들은 "초소형 카메라는 몰카 범죄에 악용되지만, 의료용·방범용 등 긍정적 용도도 있어 무조건 범죄 도구로 단정하고 규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10·20 여자들이 미리 준비한 시위 팻말 중에는 남성 혐오를 노골적으로 표현해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몰카는 인격살인, 한남 모두가 살인자' '성별 바뀌어야만 깨닫는 한남 죽어라' '볼 때는 꼴리고 찍히니 쫄리냐' '정관 수술 강제법 위원회' 등이 그런 사례다.

영페미들이 폭로한 여자화장실의 몰카용 구멍들.

영페미들이 폭로한 여자화장실의 몰카용 구멍들.

 시위 현장을 지나가던 젊은 남자들이 신기하다는 듯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자 영 페미들은 "야! 찍지 마"라고 격분해 소리쳤고 남자들은 '몰카 현행범'으로 몰릴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영 페미에게 남자는 '적' 같았다. 시위장에 늦게 온 여자들에게 "자매들" "자이스(자매+나이스)"라며 열렬히 환영한 태도와는 극명하게 대비됐다.
 주최 측은 화장실 몰카 '미러링(혐오를 혐오로 받아치기)' 퍼포먼스로 현실을 풍자했다. 남자 얼굴 가면을 쓴 남장 여자가 남자 화장실을 사용하는 장면을 연기하자 여자들이 주위에서 촬영했다. 여성 차별을 비판하는 시위 현장에서 공공연히 남성 차별이 벌어졌다.

여성들은 요즘 화장실 몰카 구멍을 막기 위해 실리콘을 필수품처럼 가장에 넣고 다닌다.

여성들은 요즘 화장실 몰카 구멍을 막기 위해 실리콘을 필수품처럼 가장에 넣고 다닌다.

영페미 시위 구호들

영페미 시위 구호들

 시위를 지켜본 한 30대 남자는 "여성 차별을 극복하려면 깨어 있는 남자들과의 연대가 필요할 텐데 모든 남자를 적대시하는 듯한 모습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영 페미들은 급기야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을 패러디해 '여혐민국의 주권은 한남에게만 있고 모든 권력은 한남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쳤다. 이런 주장에 발끈한 일부 남자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영 페미를 상대로 '성전(性戰)'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영 페미들의 주장에는 한계가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기성세대 남자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도 적지 않게 발견했다. '우리는 성범죄로 희생된 모든 자매의 분신이다' '목이 터지도록 소리치라. 우리의 자매들이 숨죽여 울지 않도록' '몰카에 울지 않게 우리가 지켜줄게'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세상은 우리에 의해 바뀔 것이다' 등의 구호가 폐부를 아프게 찔렀다.

영 페미들은 몰래카메라 판매부터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 페미들은 몰래카메라 판매부터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차례 대규모 거리 시위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놀란 정부가 지난 15일 5개 부처 합동으로 불법촬영 범죄 근절을 위해 ^공중화장실 일제 점검 ^불법 촬영 카메라 탐지기 재원 50억원 확보 등의 대책을 내놨다. 물론 영 페미들은 '일회성 정부' '말뿐인 대책'이라며 여전히 불만이다.
 남자 몰카범죄 검거율은 96%라지만 기소율은 31%뿐이고, 8명의 여자 사진을 몰래 찍은 남자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성범죄 관련 법률 12개 중 10개는 여전히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가 여성들의 목소리에 이처럼 미온적으로 반응하면 영 페미들의 성난 시위는 7월 이후에도 계속될 것 같다.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불안감을 덜어줄 여성 안전 관련 획기적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영 페미들의 몰카 규탄 시위 구호.

영 페미들의 몰카 규탄 시위 구호.

 여성 팬이 많은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에게 다음 달 7일 예정된 대학로 3차 집회 현장에 민정시찰을 꼭 한번 나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불편한 용기'를 외치는 그녀들의 육성을 듣다 보면 '불편한 진실'이 보일 것이다.

영 페미들은 7월 7일 대학로에서 3차 몰카 규탄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장세정 기자

영 페미들은 7월 7일 대학로에서 3차 몰카 규탄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장세정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윤가영 인턴기자가 이 기사의 디지털 영상 편집 작업에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