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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야수를 가두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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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 케인즈는 기업이 투자를 하는 데에는 객관적 근거보다는 기업가들의 주관적 판단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봤다. 쉽게 말해 촉(觸) 내지 감(感)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기업의 야수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비메모리 반도체에 도전하는 삼성전자와 수소차 모험에 나선 현대차다.

대통령 삼성 행사 참석 논란 일자 #김상조 “재벌개혁 의지 변함없다” #메시지 혼란에 기업은 눈치 급급

삼성은 비메모리 공략을 위해 13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반도체 시장의 3분의 2가 비메모리라지만, 땅따먹기하듯 밀고 들어갈 수는 없다. 메모리 사업이 군단을 동원한 초원 전투라면 비메모리는 정교한 공성전(攻城戰)이다. 비메모리 사업은 설계(팹리스)와 생산(파운드리)으로 나뉜다. 반도체 용도에 맞춘 설계 작업은 말하자면 닫힌 성문을 여는 과정이다. 설계업체 주문에 따라 열쇠, 즉 실제 반도체 칩을 만드는 일이 파운드리다. 삼성이 대만 TSMC를 제치고 파운드리 1위를 꿈꾼다지만, 삼성과 경쟁하는 비메모리 공룡 인텔·퀄컴 등이 흔쾌히 주문을 내줄 리 없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면 좋겠지만,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이란 말이 왜 생겼겠나. 인텔은 1980년대 메모리 사업을 포기한 뒤 도약했다.

현대차의 수소차 도전에는 고립무원이란 단어까지 추가해야 할지 모른다. 세계적으로 미래차 주류는 전기차로 정리돼 가는 게 현실이다. 2003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수소차 상용화를 목표로 내걸었던 미국은 수소연료전지의 경제성 문제로 방향을 전기차로 틀었다. 수소차는 아직 가능성 가득한 미래의 땅일 뿐이다. 현대차가 수소차에 힘을 쏟는 사이 중국은 전기차 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EV 세일즈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전기차 판매 10대 업체 중 절반이 중국 기업이다. 현대차는 겨우 8위에 랭크돼 있다.

험로를 나서는 기업 등 뒤에는 정부가 있다. 집권 2년 동안 이렇다 할 미래 먹거리 하나 챙기지 못했다는 비판에 비메모리와 수소차를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 국무회의에서 “비메모리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현대차 행사장에서는 “내가 수소차 홍보 모델”이라고 자처했다. 정부는 지난달 비메모리 반도체·미래형 자동차·바이오를 ‘중점 육성 산업’으로 정했다. 기업이 정부 눈치 보느라 사업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부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정부 독려에 발맞춘 기업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문 대통령이 삼성전자 행사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자 한 진보 시민단체의 관계자가 말했다. “꼭 이 시점에서 만났어야 했나. 촛불 정부의 감수성이 이렇게 없나.” 이 부회장의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삼성바이오 수사도 생각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기류를 의식했을까. 김상조 공정위원장도 KBS에 출연해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는 전혀 후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대통령이 어쩌다 ‘친기업 행보’를 보이면 어김없이 정부·여권에선 “확대해석은 금물”이라는 부언(附言)이 따른다.

‘굿캅 배드캅’ 같은 역할 분담인가. 한쪽에선 달래고 한쪽에선 어른다. 이게 전략이라면 효과 만점이다. 기업들이 기대와 실망 사이를 줄타기하며 정부 눈치를 살피게 한다. 엇갈리는 신호에 갇혀 기업의 야수성은 비루한 생존 본능으로 바뀐다. 혼란스러운 메시지의 책임은 결국 누가 져야 하는가. 기업 행사장에서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은 사뭇 말이 다르다. “최저임금과 52시간 노동으로 갈등이 있겠지만, 더 큰 틀의 사회적 합의를 이뤄가야 한다(원로 간담회).”

트럼프가 미국 기업의 야수성을 깨운 비결이 기업인에 대한 입에 발린 격려는 아닐 것이다. ‘친기업’ 비난을 무릅쓰면서 규제를 줄이고 법인세를 낮춰 야수들이 뛰어놀 숲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기업 행사 참석해 덕담 한마디 한 걸 두고 이렇게 설왕설래하는 한국에서 언감생심 가능한 일일까.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