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좋은 날만 끝없이 계속되는 삶, 그게 과연 행복일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35)

‘재미있는 독일 책’ 이거 “유능한 진보”나 “깨끗한 보수”처럼 희귀하다. 개인적 편견 또는 선입견인지 모르나 프랑스 책은 현란하지만 공허하고, 독일 책은 치밀하되 딱딱하다. 그러다 보니 종종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독일 책을 만나면 눈이 번쩍 뜨인다. 『내 인생의 결산보고서』(그레고어 아이젠하우어 지음, 책세상)이 그런 드문 예다.

『내 인생의 결산보고서』, 그레고어 아이젠하우어 지음.

『내 인생의 결산보고서』, 그레고어 아이젠하우어 지음.

10여 년 동안 평범한 사람들의 추모기사를 써온 철학자가 썼다 하면 먼저 “으악” 소리가 나올 법하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추출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10가지 질문’을 성찰한 글이라면, 에세이라도 쉬 손이 가지 않을 것이다.

기우다. 지은이가 던지는 10개의 질문은 꽤 진지하긴 하다. ‘스스로 생각할 것인가, 남에게 시킬 것인가’에서 ‘죽어서도 살 수 있을까’에 이르는 질문은 살아가면서 한 번쯤 부딪치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수호 천사는 누구인가’란 질문은 크게 관심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한데 이에 대한 통찰은, 슬며시 웃음이 날 만큼 발랄하고 무릎을 칠 정도로 깊다.

“책을 읽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권하면서 지은이가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쫓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조언하기가 더 쉽다”는 프랑스 문필가 라로슈푸코의 말을 인용하면서 철학자들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꼬집는다.

여기서 없어 봐야 비로소 필요성을 느낀다는 ‘로빈슨 크루소 패러독스’란 걸 소개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마당엔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는 쓸데없는 질문이란다. 또 먹고사는 문제야 어찌 해결한다 해도 그 지독한 외로움은 성직자, 영양학자가 아니라 친구 한 명만 있으면 해결되는데 철학자들은 공연히 치장한다는 이야기다.

영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1954)'의 포스터.

영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1954)'의 포스터.

“책상에서 나오는 끔찍한 생각들이 전장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사람들이 방에서 나와 돌아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책상에 앉자마자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생긴다”처럼 신랄하지만 곱씹어 볼 만한 구절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에덴동산의 아담은 행복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주장을 펴는 건 어떤가. 좋은 날이 끝없이 계속되는 삶은 개선할 것도 없고, 아름답게 꾸밀 것도 없고 불평할 것도 없지만 사육장에 갇혀 사는 삶과 같다나.

그에 따르면 우리는 행복을 강요받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끝없는 노력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악몽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행복이란 건 없다! (중략) 행복은 두 재앙 사이에서 잠깐 한숨 돌리는 짬이다.(중략) 그러므로 행복하지 않은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 그곳에는 이미 선하든 악하든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신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을 다른 나라에 정착시키려 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공감이 가지 않는가. “당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신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인도로 가길 권한다. 그곳에 가서 사원을 지키는 아무에게나 물으라. 당신 자신만을 위한 신이 있는지.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물을 것이다. 하나만 필요하세요?” 이런 구절은 또 어떤가.

이 책은 잘 차려진 잔칫상 같다. 우선은 문학, 역사, 심리학 등에서 길어낸 명구들이 입맛을 당긴다. 예컨대 “행복한 사람이 감사할 줄 아는 게 아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프랜시스 베이컨)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진실을 깨닫는다. 그것으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오스카 와일드) 등이 그렇다. 여기에 이토록 영양가 높고, 맛난 ‘재료’을 위트와 풍자로 요리해낸 지은이의 내공 덕에 책은 더욱 매력적이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