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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뽑아놔봤자 다 비광이여" 이건 무슨 뜻?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34)

나는 꽤나 과묵하고 내성적이다.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웃거나 의아하겠지만 이건 사실이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는 일을 하는 기자 일을 30년 가까이 했으니 그런 의구심이 근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초등학생 때만 해도 나는 묻는 말에 답하는 외에는 먼저 말을 건네지 않는 편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나정(고아라 분)과 재준(정우 분)은 경상도 출신으로 등장한다. [사진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영상 캡쳐]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나정(고아라 분)과 재준(정우 분)은 경상도 출신으로 등장한다. [사진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영상 캡쳐]

사투리 때문이었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경상도에서 살았던 내게 경상도 사투리는 사투리가 아니었다. 그저 주변의 누구나 하는 보통 말, 일상어였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전학 온 뒤 영 다른 말투를 접하고서야 내 말투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어무이요, 수일이 즈그 엄마 왔데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나를 서울내기들이 흉내 내며 놀리곤 했다. 그게 싫어서 입을 닫았고, 말수가 줄며 나는 자연히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로 자리매김 됐을 수밖에.

그렇게 ‘사투리 본능’이 숨어 있기 때문인지 내게는 각 지방 사투리가 정겹다. 얼핏 들으면 대화가 아니라 싸우는 것 같은 경상도 말, “솔찬히 거시기한” 전라도 말, 천연덕스럽고 어찌 들으면 능청스럽기까지 한 충청도 말 등등 모두 그렇다. 소설 등 텍스트에 간간이 쓰인 사투리를 보면 반가운 나머지 온통 사투리로 된 글이 있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했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을 위한 책을 소개하련다. 찰진 충청도 사투리로 풍자와 해학, 그리고 페이소스를 담아낸 『한 치 앞도 모르면서』(남덕현 지음, 빨간 소금)이다. 대전 출신인 작가가 현지에서 부대끼며 캐어낸 이야기들을 담았는데 웃픈 글을 읽는 재미야 말할 것도 없고 꽉 찬 삶의 지혜도 간간이 백인 것이 놓치기 영 아깝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남덕현 지음.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남덕현 지음.

선거철에 시골 다방에서 오가는 대화를 정리한 ‘시골평론’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 친박, 반박, 비박을 논하던-책은 2017년 나왔다-이들 중 누가 묻는다.
“화투판이만있구정치판이는읎는 게 있는디 뭔 중 아는감?”
“뭔 박인디?”
“독박. 독박은 노상 궁민덜이 대신 쓰니께! 정치하는 것덜은 마냥 고, 궁민덜은 노상 독박!”

그래도 선거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는 이 ‘평론가’가 일갈한다.
“츤하에무식헌 소리 허구 있네. 허믄뭐헌댜? 저거덜뽑아놔봤자 다 비광이여, 비광! 서루잡아먹을드끼 으르렁 그르렁 하는 것 같어두, 겔국서루붙어먹으야 삼 점 나는 비광들이라니께! 허, 쌍눔의 화투판!”

이걸 보고 시골 무지렁이들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을까. 신문이며 TV에 등장하는 미제 박사 교수, 무슨 정치연구소장들의 고담준론보다 정곡을 찌르지 않는가. 이게 통렬하다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대목도 적지 않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열혈사제'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캐릭터에 녹여 연기하는 배우 음문석. [사진 드라마 '열혈사제' 영상 캡쳐]

최근 종영한 드라마 '열혈사제'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캐릭터에 녹여 연기하는 배우 음문석. [사진 드라마 '열혈사제' 영상 캡쳐]

수덕사로 나들이 가는 노인들이 시골 역에서 설왕설래 중이다. 버스를 대절하는 대신 기차를 고집했던 ‘성님’이 늦은 바람에 당초 예정했던 기차를 놓친 모양이다.
“일찍 인날(일어날) 자신이 읎으믄 돈이래두 총무헌티맽기든가! 그랬으믄우덜이래두 먼저 갔을 거 아뉴? 안 그류?”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빠스대절했으믄 수덕사 가서 머리 깎구 여승 되구두 남을 시간이여!” “얼래? 여승이 뭐여? 부처 되구두 남을 시간인디!”
그러자 죽을죄를 지은 ‘성님’이 먼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마디 한다.
“아, 수덕사가 워디 가?”

방언을 채록하고 뜻풀이를 하는 책으로 그쳤다면 그저 신기방기한 책으로 읽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이 책에서 사투리는, 중요하긴 하지만 외피(外皮)로 읽힌다.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 했던가. 옛사랑에서 정치까지 지은이가 구수하거나 정겨운 말투로 두루 담아낸 이야기들이 뭉클하고, 따갑고, 웃음을 자아낸다. 지은이가 앞서 썼다는 『충청도의 힘』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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