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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중 경제 파탄…장징궈 수습책에 우궈쩐 반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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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75>

소련 교육을 받은 29세의 시골 현장 장징궈는 아동들에게 손을 깨끗이 하라고 강조하며 이런 광경을 자주 연출했다. 1939년 7월, 장시성 간난(竷南). [사진 김명호]

소련 교육을 받은 29세의 시골 현장 장징궈는 아동들에게 손을 깨끗이 하라고 강조하며 이런 광경을 자주 연출했다. 1939년 7월, 장시성 간난(竷南). [사진 김명호]

1946년 5월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국민당 선전부장 우궈쩐(吳國楨·오국정)을 상하이에 투입했다. 시장 취임 첫날 우궈쩐은 기자들에게 호언했다. “누적된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깨어 있는 정치를 실현하겠다.” 중국에선 씨도 안 먹힐 소리였다. 미국 언론들은 찬사를 보냈다. “중국에서 보기 드문 민주주의 신봉자다.” 뉴욕 시장 세 차례 역임한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H. La Guardia)에 비유했다. “동방의 라과디아가 상하이에 출현했다.”

공산당은 파업, 정부는 돈 마구 찍어 #물가 치솟아 법폐 구매력 상실 #장 “화폐개혁·물가동결 내일 반포” #우 “경제 억압하면 국가에 재앙” #장 “의견 듣자는 게 아니다” 묵살 #우, 장제스에게 달려가 사직 요청

1개월 후 국·공 양당의 군대가 무력 충돌했다. 3년간 계속될 국·공내전의 막이 올랐다. 중공은 총질 못지않게 도시에 신경을 썼다.

상하이는 국민당 통치구역(國統區·국통구)이었다. 중국 최대의 기업과 대형 공장들이 몰려 있었다. 노동자도 80만 명을 웃돌았다. 그중 50여만 명이 노조 가입자였다. 내전이 발발하자 국·공합작 시절 잠복해 있던 중공 지하당원들이 기지개를 폈다. 대기업과 공장에 당 지부를 설립했다. 침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상하이 세관에도 지하당 조직이 있을 정도였다. 타협에 반대하고, 투쟁에 불을 질렀다. 분규와 파업이 그치지 않았다. 대학도 요동쳤다. 수업 거부와 시위가 잇달았다. 주동자 대부분이 중공 당원이었다. 목표가 명확했다. 공산당의 이익과 전쟁 승리였다.

상하이 시장 시절, 회의를 주재하는 우궈쩐(왼쪽 둘째). 1947년 봄, 상하이 시 정부 회의실.

상하이 시장 시절, 회의를 주재하는 우궈쩐(왼쪽 둘째). 1947년 봄, 상하이 시 정부 회의실.

중공 통치구역(解放區·해방구)은 극좌를 경계했다. 파업을 엄금했다. 기관지 해방일보는 연일 상하이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자본주의가 저지른 온갖 죄악의 소굴이다. 인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아라비안나이트』에나 나옴 직한 얘기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해방구 기업과 노동자들은 위대하다. 공장을 조화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서로를 배려하다 보니 파업할 이유가 없다.”

상하이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전쟁 2년 차에 접어들자 법폐(法幣)가 구매력을 상실했다. 미국 AP통신이 생동감 넘치는 기사를 배포했다. “1937년 법폐 100원은 소 두 마리 값이었다. 1년 후 한 마리로 줄어들었다. 41년에는 돼지 1마리를 살 수 있었다. 43년이 되자 닭 한 마리, 45년에는 생선 1마리, 46년에는 계란 두 개, 47년에는 성냥 세 갑이 고작이다.” 발행 총액도 가관이었다. 항일전쟁 8년간 국민정부는 5569억을 발행했다. 내전 막바지인 1948년 8월이 되자 604조로 증가했다. 이쯤 되면 망한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국민당은 극비리에 해결책을 모색했다. 1948년 8월 19일 오후 중앙은행 총재 류홍쥔(兪鴻鈞·유홍균)이 우궈쩐에게 전화를 했다. “방금 상하이에 도착했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도 함께 왔다. 저녁 같이하자. 의논할 일이 있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약속 장소에 간 우궈쩐은 깜짝 놀랐다. 소수의 국민당 주요인물과 당 상하이 시 주임, 시의회 의장 등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류홍쥔이 문서 1장을 내밀었다. “재정경제 긴급 처분에 관한 정부 공문이다. 잘 읽어 봐라. 내일 반포한다.”

엄청난 내용이었다. “금원권(金圓券)으로 법폐를 대체한다. 구 법폐와 황금, 외환 소지자는 은행에서 금원권과 태환(兌換)해야 한다. 모든 물가를 반포 당일 가격으로 동결시킨다. 반포와 동시에 시행한다.” 열람을 마친 우궈쩐이 식은땀을 흘렸다. 류홍쥔에게 요구했다. “상하이는 국제도시다. 봉쇄된 도시가 아니다. 물가 동결은 불가능하다. 재삼 고려해 달라고 장제스 위원장에게 고해라.” 류홍쥔은 장징궈를 힐끗 쳐다봤다. 단호한 모습에 기가 죽었다. “이미 정해졌다. 돌이킬 수 없다”며 짜증을 냈다.

우궈쩐의 눈길이 장징궈를 향했다. “중국은 소련이 아니다. 상하이는 장시(江西)성 같은 벽촌도 아니다. 정부가 경제를 억압하면 국가에 재앙이 미친다.” 장징궈가 발끈했다. 12년간 소련에서 온갖 신산(辛酸)을 겪었고, 귀국 후 장시성 남부 현장(縣長)시절 ‘서민 정치가’ 자질을 인정받은 ‘철혈(鐵血)의 장징궈’였다. 스탈린식 통치에 익숙하다 보니 허구한 날 민주 타령이나 해 대는 우궈쩐과는 체질이 맞지 않았다. 견해를 분명히 했다. 대자본가를 호랑이에, 영세상인을 파리에 비유했다. “이 일은 정치문제다. 경제문제가 아니다. 나는 호랑이 때려잡으러 왔다. 서민과 영세상인은 나의 보호대상이다. 협조를 구하기 위해 시장을 보자고 했다. 의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궈쩐은 장제스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 난징(南京)으로 달려갔다. 장제스에게 사직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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