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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궈쩐 “포탄 맞더라도 공산당 안 해” 저우의 회유 거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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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3호 32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74>

외교부 차장시절 외교부장 쑹즈원(앞줄 가운데), 주미 대사 구웨이쥔(顧維鈞·앞줄 왼쪽 첫째)과 함께 중·영평등조약 체결을 마친 우궈쩐(앞줄 오른쪽 첫째). 1943년 1월 11일, 전시수도 충칭. [사진 김명호]

외교부 차장시절 외교부장 쑹즈원(앞줄 가운데), 주미 대사 구웨이쥔(顧維鈞·앞줄 왼쪽 첫째)과 함께 중·영평등조약 체결을 마친 우궈쩐(앞줄 오른쪽 첫째). 1943년 1월 11일, 전시수도 충칭. [사진 김명호]

남녀 관계만 때와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무슨 일이건 다 그렇다. 우궈쩐(吳國楨·오국정)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청년시절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18년 만에 다시 만났지만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점이 기가 막혔다. 항일전쟁을 위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밀월시기였다. 우궈쩐은 국민당 지휘부가 몰려 있던 우한(武漢) 시장,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이 우한에 설치한 중공 연락사무소 대표였다. 오랜 세월 다른 길을 걸었지만 옛 감정이 되살아나기까지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었다. 번갈아 베푼 두 차례 만찬으로 족했다.

저우 “거대한 별을 따고 싶었는데 #우리 사이 영원한 장벽이 생겼다” #충칭서 국·공 대표로 다시 만나 #담판 때마다 한 치 양보 없는 대립 #장제스, 우궈쩐 상하이 시장 발탁 #장징궈와의 악연도 그곳서 시작

저우언라이는 해만 지면 시장 관저로 갔다. 우궈쩐과 저녁 하며 밤늦게까지 소일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국·공 양당 간의 문제는 서로 피했다.

일본군이 우한을 압박했다. 정부는 철수를 서둘렀다. 우한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밤, 저우언라이가 포도주와 예쁘게 만든 찐빵 들고 우궈쩐을 찾아왔다. “우한의 마지막 저녁 먹으러 왔다.” 우궈쩐은 영문을 몰랐다. “우한 시장 오늘로 끝났다. 위로라면 몰라도 축하받을 일은 없다.” 저우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바쁘다 보니 생일도 까먹었구나. 오늘이 네 생일이다.” 우궈쩐은 경악했다. “맞다. 오늘이 음력 9월 초이틀, 내 생일이다. 그걸 기억하다니.” 두 사람은 20년 전 결의형제 맺으며 사주(四柱)를 교환한 적이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입을 열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위원장이 어제 우한을 떠났다. 너는 언제 떠날 예정이냐?” 우궈쩐은 담담했다. “머물 수 있을 때까지 머물겠다.” 저우가 본론을 꺼냈다. 표정이 평소답지 않았다. “나와 함께 가자. 차편을 준비해 놨다.” 공산당과 함께 가자는 의미였다. 우궈쩐은 총명했다. 정중히 거절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같이 갈 수는 없다. 각자 안전한 길을 택하자.”

저우언라이는 우궈쩐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교외에 포탄소리가 요란하자 전화기를 들었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위험하다.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같이 가자.” 우궈쩐은 단호했다. “내 생각은 변함없다. 일본군의 포탄에 몸을 맡길지언정, 공산당과 함께하지는 않겠다.” 저우는 친구의 선택을 존중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저우언라이가 옆에 있던 둥비우(董必武·동필무)에게 한마디 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별을 따고 싶었다. 우궈쩐을 쟁취하기는 틀렸다. 우리 사이에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장벽이 생겼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저우의 판단은 정확했다. 우궈쩐은 국민당이 배출한 탁월한 행정가였다.

1937년 12월, 중공대표 자격으로 우한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사진 김명호]

1937년 12월, 중공대표 자격으로 우한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사진 김명호]

전시수도 충칭(重慶)에 정좌한 장제스는 시장감을 물색했다. 우궈쩐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저우언라이도 국민정부 정치부 부주임과 중공 충칭주재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같은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우궈쩐은 저우와 개인적인 접촉을 피했다. 국·공 간에 담판할 일이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명절 때 전화는 주고받았다. 안부나 묻는 정도였다.

우궈쩐은 미국 정계와 언론계에 절친한 사람이 많았다. 국민정부는 미국의 원조가 시급했다. 외교부장 쑹즈원(宋子文·송자문)은 미국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쑹즈원 대신 외교부를 관장할 인물로 우궈쩐을 낙점했다.

우궈쩐은 비서 한 명을 데리고 부임했다. 부원들이 웅성거렸다. “차장이 외교부 사정을 모른다. 문턱에도 와 본 적 없는 사람을 비서로 채용했다. 차장은 성격도 급하다고 들었다. 급한 성격은 외교에 금물이다.”

몇 주일이 지나자 우궈쩐은 비서를 외교부에서 내보냈다. 중국의 쉰들러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외교관 허펑산(何鳳山·하봉산)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우궈쩐은 부원들에게 사과했다. ‘생소한 곳에 차장으로 오다 보니 중년에 출가한 승려처럼 서툰 짓을 했다. 계통과 조직이 엄밀한 외교부의 위대한 전통을 내 손으로 파괴했다. 그간 중국외교는 국제사회에서 실수가 많았다. 나 같은 사람 때문이다. 다시는 외교와 상관없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않겠다. 나의 오만에 유감을 표한다.’ 우궈쩐은 외교부를 떠나는 날까지 약속을 지켰다. 매사에 민첩했지 급하지는 않았다. 대답만 잘하고 느려 터진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훈수 두기 즐겨도 듣기는 싫어하는 인재들이 많아야 진정한 외교부라는 말을 자주했다. 중앙당 선전부장으로 간 후에도 외교부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자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경제 중심지 상하이(上海) 시장에 우궈쩐을 임명했다. 1950년대 중반,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장징궈(蔣經國·장경국)와의 악연도 상하이에서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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