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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믿음 사라진 불신의 시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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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호 29면

남승률 경제산업에디터

남승률 경제산업에디터

사회심리학계 거장이자 『신뢰의 법칙』 저자인 데이비드 데스테노 교수는 “신뢰는 서로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구체적인 점수로 나타낼 수 있는 신용과 달리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유경제와 신뢰 전문가이자 『신뢰 이동』의 저자인 레이첼 보츠먼은 신뢰를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그는 “신뢰가 사라진 불신의 시대가 아니라 신뢰가 이동했을 뿐”이라며 “신뢰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연결해주는 다리”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모르는 것(미지의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없애야 ‘신뢰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익만 좇는 기업 후진 행태 줄이어 #선진국·후진국은 ‘신뢰 자본’ 차이

이른바 ‘착한 기업’도 표방하지만 이익 극대화가 궁극적 목표인 기업에 신뢰란 어떤 의미일까. 재계에서는 두 사람이 내린 신뢰에 대한 정의에 부합하거나 배치되는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국내 바이오 업계는 물론 증시까지 뒤흔든 코오롱생명과학의 골관절염 유전자 치료제인 ‘인보사케이주(이하 인보사) 사태’가 대표적이다. 인보사의 주성분 중 하나가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때의 연골유래세포가 아닌 태아신장유래세포로 밝혀져 유통과 판매가 중단됐다. 이웅렬 전 코오롱그룹 회장이 평소 “20년 걸려 낳은 네 번째 자식”이라며 자부심과 애착을 보인 대형 신약이지만 종양을 유발할 수 있는 신장세포로 만들어져 후폭풍이 거세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직결되는 의약품인데도, 코오롱은 인보사의 임상시험부터 판매까지 12년여 동안 무엇을 감춘 것인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무엇을 밝혀냈나.

LG화학과 한화케미칼은 대기오염 물질을 불법 배출해 기업을 향한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환경부는 미세먼지 원인 물질인 먼지·황산화물·질소산화물의 배출 수치를 조작한 측정 대행업체 4곳과 측정 의뢰 사업장 235곳을 적발했다. 특히 이들 업체는 서로 짜고 측정값을 축소·조작하거나, 심지어 측정하지도 않고 배출 기준을 맞춘 듯 꾸민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기업 중 LG화학 여수화치공장, 한화케미칼 여수 1·2·3공장 등 6곳과 측정 대행업체 4곳은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낯선 사람의 차에 타고(차량공유 서비스), 여행 중 낯선 사람의 집에 머무는(숙박공유 서비스) 공유경제 시대의 새로운 신뢰에 주목하는 레이첼 보츠먼은 기본적인 진실(측정값)을 숨기는 것을 넘어 조작까지 서슴지 않은 두 회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재수사는 기업과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실마리가 될지 관심을 끈다. 재수사는 지난해 11월 피해자들이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을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5개월여 사이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인 필러물산을 시작으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 등이 줄줄이 구속됐지만, 판매사의 최고 책임자인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는 구속을 면했다. 이들 기업이 2011년까지 9년간 판매한 ‘가습기 메이트’는 옥시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다음으로 많은 피해자를 낸 제품이다. 소비자들은 이들 제품을 건강에 유익한 ‘살균 도구’라고 믿었다.

이른바 ‘동물국회’로까지 변질한 정치권에서 신뢰의 단서를 찾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걸음 다가섰다던 기업의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줄을 잇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1995년 펴낸 『트러스트(Trust)』에서 국가 번영을 이루기 위한 중요 요소의 하나로 ‘신뢰’를 지목했다. 그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 자본’의 차이”라며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용은 비교적 쉽게 쌓을 수 있지만 이보다 더 포괄적인 믿음인 신뢰는 다르다. 쌓기도 어렵지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남승률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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