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21)
100년 전 일이다. 포르투갈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세 아이 앞에 자신이 성모라고 하는 여인이 나타난다. 아이들은 그 여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여인, 반짝이는 물이 채워진 수정 유리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을 쏟아내는 찬란한 옷을 입고 있었다.’ 여인은 누구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성모임을 밝혔다는 이야기이다.
양을 치며 놀던 일곱 살, 아홉 살, 열 살짜리 아이들 셋이 한꺼번에 거짓말을 꾸며냈을 이유가 없는 데다 아이들의 진술은 일치했다. ‘끝자락을 별들로 장식한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가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 그것도 매월 약속한 날짜에 나타났고 몰려든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우주 쇼에 가까운 이적을 일으켰다고도 하는 그곳은 바티칸에서 인정한 세계 3대 성모 발현지 중 한 곳이다. 포르투갈의 파티마, 명색이 순례길을 걷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토마르(Tomar)에서 파티마(Fatima)로 향했다.
가난한 마을에서 양치기하는 아이들, 돌탑을 쌓으며 놀던 아이들 앞에 성모가 나타나서 인류를 위한 계시를 알려줬다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벌판은 없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광장을 중심으로 기념품 상점과 관광객을 위한 호텔과 음식점이 줄을 선 거대한 종교의 소비단지로 보였다. 물론 100년 전과 같을 수야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거대한 성당을 보자 알 수 없는 저항감이 생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파티마에는 순례자가 많다. 수십만 명을 한 번에 수용하는 그 넓은 성당 앞 광장을 두 무릎으로 걷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온몸을 바닥에 붙여 엎드린 채 오체투지를 하듯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경건한 의식을 지켜보자니 내 마음속 시니컬이 사그라진다. 얄팍한 비판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소망 앞에서 무색하다.
9월답지 않게 절절 끓는 날이었다. 바닥에 맨살이 닿으면 살갗이 벗겨질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걷다가 십자가상 앞에 엎드린 사람을 보았다. 익숙한 배낭과 뒷모습, 이럴 수가! 엘카(Elke)였다. 사흘 전, 아지냐가(Azinhaga)에서 무릎에 문제가 생겨 순례를 포기한다며 통곡을 했던 엘카를 파티마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알아채지 못하게 떨어져서 그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엘카는 어깨를 들썩이는 듯도 했고 한동안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 엎드린 엘카를 바라보며 나는 파티마가 엘카들을 위한 곳임을 깨달았다. 나 같은 얼치기 신자나 관광객이 성지 분위기를 운운하며 ‘볼 것’으로 소비할 이적의 신성함을 찾는 곳이 아니라 엘카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깊고 가장 여린 마음을 열어 기도하는 곳 말이다.
파티마 광장에 있는 세 개의 성당 중에 가장 작고 유리로 지어진 것이 성모의 발현 장소에 세운 것이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파티마를 찾은 사람들을 위해서 새벽부터 밤까지 미사가 진행된다. 성수기에는 매시간, 비수기에도 하루 수차례 밤까지 미사를 집전한다. 소성당 왼편으로는 초를 태우는 곳이 있다. 꼭 신자가 아니라도 계시의 장소에서 초를 바치려는 사람이 많아 언제나 줄이 길다. 엘카와 함께 미사에 참례하고 우리도 초를 봉헌하기로 했다.
엘카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품에 가득 초를 안고 나타났다.
“욕심쟁이. 무슨 초가 이렇게 많아? 성모님이 이 소원 다 들어주려면 너무 바쁘시겠다.”
대부분 초를 하나 혹은 두 개쯤 들고 있는데 한 아름 안고 나타난 엘카가 특이하기도 했지만 파티마에서 만난 후로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는 엘카를 놀려서라도 웃기고 싶었다.
“놀리지 마. 난 사랑하는 사람이 많단 말이야. 가족들, 친구들, 이건 너를 위한 초야.”
아 이런. 이렇게 되면 웃기려던 목적은 다시 실패다. 신앙이 깊은 엘카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감사기도도 하고 싶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파서 기도는커녕 일주일 동안 걷는 내내 원망만 했단 말이야.”
엘카는 또 울먹이기 시작했고 내가 어깨를 토닥였는데 그는 울음을 그치지도 못한 채 꺼이꺼이 소곤거리며 말한다.
“그런데…재희야, 이것 중에 제일 큰 거, 이게 내 거거든. 그래도 괜찮겠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엘카. 엘카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샘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자기는 욕심쟁이라고 했다. 누구보다 늘 자기가 먼저였다며 순례를 할 수 없도록 무릎에 문제가 생긴 것이 자기 욕심 때문인 것 같다고 자책했지만 난 첫눈에 그가 사랑이 많은 사람임을 알아봤었다. 솔직하고 호기심이 많고 인정이 많으며 사랑이 넘치는 여인.
“안돼 엘카. 제일 큰 건 친구를 위해 바쳐야지. 나를 위해 바치겠다고 말해줘!”
엘카는 비로소 웃었다. 소원을 빌고 축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바치는 초 타는 냄새로 가득한 광장에 서서 나는 100년 전 나타난 성모가 파티마에서 들려준 계시에 대해 생각해봤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다시 2차대전이 발생할 것이라거나, 러시아-소련에 얽힌 것 혹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 같은 걸 주려던 게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섬광이 내려꽂힌 떡갈나무 위에 나타난 이유는 겨우 그런 것을 말해주려던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려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성모가 인간에게 주고 싶었던 기적이 아닐까? 가장 크고 아름다운 기적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더 큰 사랑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초에 불을 붙이는 마음일 것이다. 파티마에서 나도 초를 켰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