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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소, 승전자존심 굽히며 "외화벌이"|소∼일 여객선 루시호|특별취재팀=안길모 부장·김 주만-김석환 기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소련의 극동지방에서 대외적으로 열린 창구는 나홋카 항이다. 블라디보스토크가 큰 항구로 알려져 있지만 군항이기 때문에 상선이나 여객선은 나홋카 항을 이용하고있다.
5월8일 오후2시30분, 취재진은 일본 요코하마로 가기 위해 나홋카 항에서 소련의 여객선 루시호에 승선했다.
1만2천t급의 호화여객선인 이 배에는 소련관광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 관광객들과 다른 국가로 가기 위해 일본에 들르는 서구관광객들, 일본에 공연가는 소련 아동발레단 단원 등으로 만원을 이뤄 정원 3백80명이 다 채워졌다.
목욕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던 호텔생활을 보냈던 승객들은 사우나를 비롯해 수영장·카지노·바 등 완벽한 편의시설을 갖춘 루시호에 만족한 듯 환성을 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차 50대 승선가능>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서비스가 소련여행기간 중 잊혀졌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다시 접하게되니 그 편리함이라는 것이 예전의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홋카에서 요코하마까지는 약 63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러시아 전통무용공연을 비롯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 별로 지겹지는 않았다.
1만2천t급의 루시호에는 승객 외에도 승용차를 50대까지 실을 수 있어 선상여행은 특히 일본인들에게 호응도가 높다고 한다.
요금은 최하 4만5천7백엔에서 최고 12만2천엔까지 6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나 승객 대부분은 6등급인 4만5천7백엔 짜리를 이용한다.
그러나 간혹 1등 칸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나타나는데 이때에는 1등 칸 전용 웨이트리스를 배속시켜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1등 칸에는 냉장고를 비롯해 부속실·응접실 등이 갖추어져 호텔의 스위트룸과 같은 느낌을 준다.
6등급 선실은 4명이 이용하는 방으로 간단한 옷장과 2층 침대, 조그마한 목욕탕이 시설의 전부다. 그러나 시베리아 열차와 비교하면 호텔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일본인 송출 항구>
승객들은 배속에서의 무료함을 달래려 수영이나 사우나·일광욕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일본인 관광객의 경우 조금은 다른 행동을 연출한다.
조금 나이든 일본인들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젊은 층들은 삼삼오오로 자리해 자신들의 소련여행담과 함께 과거 자신들의 역사가 스며있는 나홋카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한다.
나홋카는 2차 대전 후 소련령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송출하던 곳이라 그런지 일본인 관광객들의 회고조의 이야기와 한탄을 이곳 저곳에서 들을 수 있다.

<"못사는 나라다">
선상에서 만난 한 일본인관광객은 2주일 동안 소련극동지역을 돌아보고 니가타로 돌아가는 길인데 솔직히 『소련에 일본이 패전한 이유를 모르겠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전화번호하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형편없는 나라에 일본이 패전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학생들이 학술여행 코스로 만주나 소련의 극동지방을 찾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것은 패전국이라는 콤플렉스를 과거 그들의 시민지역을 관광시켜 교훈을 얻게 하고 콤플렉스를 깨뜨리려는 의도에서라고 한다.
루시호의 승무원「이고리」씨(26)는『요즘은 화·토요일 두번씩만 운항하나 방학 철이 되는 7, 8월에는 운항편수를 늘린다』고 했다.
이들 일본인 관광객들의 위세는 대단하다. 자신들을 굴복시킨 나라가 형편없이 못 사는데 다 여행하면서 맛본 우월의식이 겹쳐 나온 듯한 이들의 행동은 그러나 소련사람들 한테는 묘한 반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루시호의 한 여승무원은『일본인들은 술을 마셔도 주변사람에게 권하거나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마시고 점잖은 듯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민족』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본인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어도 그들의 최대 고객이자 선망의 대상인 전자제품 등이 풍부한 일본인들에게 러시아인들은 무척이나 약한 인상이다.
식당에는 일본제 기코만 간장을 비롯해 아지노모토 조미료 등이 갖추어져 있고 요코하마 에 근접할수록 더욱 더기가 죽는 모습이었다.
요코하마까지 오는 62시간동안 배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은 제공되는 음료와 식사 이외의 군것질을 전혀 하지 않았다.
모스크바나 하바로프스크 등에서는 그들이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었던 외국제 맥주· 라면 등 기호식품이 풍부한데도 이들은 일체 사먹지 않았다.

<화대 백불 제의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러한 현상은 모두 소련의 달러부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소련당국은 극심한 외화 난 때문에 법으로 외국에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여행기간에 상관없이 2백20루블 이상은 환전을 해주지 않는다.
달러로 3백52달러에 불과한 외화를 소지한 대부분의 러시아 여행객에게 맥주나 라면은 유혹은 가지만 살수 없는 대상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전자제품 등을 사 소련에서 몇십 배의 매매차익을 노리기 위해서도 돈을 아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 안의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도 오로지 춤만을 추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달러가 요구되는 음료수를 사 마시지 않는다.
외국 나갈 기회가 많지 않지만 일단 기회가 주어지면 되도록 많은 외화를·마련해 전자제품 등을 사 가지고 올 꿈을 갖고있는 그들에게 공정환율의 몇 배가되는 암달러도 문제가 되지않고 아무리 맛있는 외국산 맥주와 라면이라도 눈에 들어올리 만무한 것이다.
자주 소련을 다녔다는 한 일본인 상인은 가끔씩 외화를 벌기 위해 하룻밤 값으로 최하2천5백엔에서 최고 1백달러를 제의해 오는 여승무원들이 있을 정도라고 알려주었다.
이렇게 소련선 루시호의 선상에서는 소련여행을 통해 우월감과 자신감을 회복한 일본인들과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외화를 빼내기 위해 비굴함도 감수하는 러시아인들의 행동이 기묘하게 결합된 채 시간이 흘러갔고 62시간이 지난 후에 도착한 요코하마 항에서 어깨가 처져버린 승무원들을 뒤로 한 채 취재진은 루시호에서 하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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