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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의 금도와 권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평민당 이철용 의원의 연행 여부를 둘러싸고 대한 항공 소속 여객기의 김포 공항 착륙을 거의 30분 동안 지체시킨 안기부의 조치는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옳지 못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안보적 차원」이란 요술 방망이를 가지고 무소부위로 초법적 수사권을 자행했던 과거의 행태를 기억에서 되살리는 하나의 불길한 증좌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일부 국민 여론은 6공화국 들어서면서 공권력의 부재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여논은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과거의 초법적 공권력 행태의 부활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민주화 변혁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법규범과 통념의 테두리 안에서 누가 봐도 수긍이 가는 형태로 공권력이 행사되어야만 국민은 이를 지지하고 정부는 유신이래 손상된 공권력의 권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신분이 확실하고 도주의 위험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한 공안 사건 수사 대상자를 연행하기 위해 1백여명의 승객이 탄 여객기를 비상 연료가 거의 소진될 때 까지 하늘에 남아 있게 한 조치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구나 공안 당국이 사전 또는 긴급 구속 영장을 발부 받아 공항에서 이 의원을 구속할 것인가, 아니면 소환장으로 출두 요구를 할 것인가를 두고 결정을 내리는데 시간을 벌기 위해 그런 무리한 일을 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더욱 기가 찰 일이다.
우리는 이 사건이 상징하는 공안 당국의 비상식적 행태도 경계해야 되지만 공안정국을 맞아 사회 곳곳에서 비슷한 유의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도 심각하다고 본다.
예컨대 언론회관 이사장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임수경양의 언니가 별 설득력 없는 이유로 갑자기 해고된 사건이라든지, 7·7선언 이후 안심하고 북한을 방문한 해외 교포들에 대해 귀국을 불허하리라는 당국의 발표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증후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의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시간적 연계성 속에 이뤄지고 있다. 특히 방북 교포의 입국 불허는 앞으로의 교민정책과 대북 경쟁 관계에서 해가 되면 됐지 이득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런 현상을 지적함에 있어 우리는 우리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공안당국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는 점을 과소평가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안기부를 포함한 공안당국이 지금의 상황을 「공안 만능 시대」로 되돌아갈 호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 공작이 가열화하고 있는 이때에 공안 당국의 역할은 북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일선에 속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안 당국은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 직무 수행의 편의주의와 민주화 사회 속의 행동 규범 사이에 엄격한 선을 긋고 행동하는 변신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형성된 공권력 행사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는 큰 손상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점을 공안당국은 이번 사건의 교훈으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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