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장준하는 김원봉을 경멸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칼럼니스트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칼럼니스트

김원봉은 의백(義佰)이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吉林)성. 그는(21세) 거기서 ‘의열단’을 만든다. 단장은 의백으로 불렸다. 의형제 집단의 맏이다. 그 말들은 전투적 비장미를 드러낸다.

‘문재인 역사코드’의 충격적 파열 #훈장 논란 김원봉에게 장준하는 #“김구의 임정을 불신 부채질해 #학병 출신 포섭하려 미인계도”

영화 ‘암살’(2015년 개봉)의 출발은 김원봉이다. 관객 1200만. 야당대표 시절 문재인 대통령도 봤다. 그의 영화평은 감동이다.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 김원봉은 ‘문재인 역사 공간’에 진입했다.

영화 속 김원봉은 강렬하다. 실제 항일 현장의 젊은이들에겐 어떻게 다가갔을까. 1944년 태평양전쟁 중국 전선의 일본군 부대들. 학병 출신 장준하·김준엽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 군대를 탈출한다. 목적지는 충칭(重慶)의 임시정부. “이분(김구 주석)을 찾아 6천리, 7개월의 행군을 했다.”(장준하 수기 『돌베개』)

지난해 장준하 선생 42주기 추모식. 문 대통령은 존경의 추도사를 보냈다. “돌베개를 베고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생의 생애는 애국을 향한 대장정이었다.” 장준하의 상징은 『사상계』와 민주화 투쟁이다. 그의 역사 위치는 박정희 정권의 대척점. 그것은 ‘문재인 역사 코드’를 장식한다.

1945년 1월 학병 50여 명은 충칭에 도착했다. 그들은 백범 김구의 환영사에 감격했다. 김원봉 군무부장도 나왔다. 그의 독립투쟁은 장쾌하다. 의열단→조선민족혁명당 창당→조선 의용대 주역이다. 42년 그는 임시정부와 광복군(부사령관)에 나중에 합류했다.

그때 김원봉의 첫 인상은 이랬다. “거무스름한 얼굴은 혁명가다운 굳은 의지가 엿보였고,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구재(口才)가 모자라는 듯, 이론적으로 우리의 투쟁을 설명하려 하면서도 충분히 표현 못하는···”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현대사 장정(長征)』) 엘리트 조선 청년들은 김원봉의 극적 드라마를 원했다. 하지만 기대에 미흡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의 회고(임정 국무위원, 건국훈장)는 흥미롭다. 그는 김원봉의 오랜 동지다. “약산(김원봉 호)은 사람을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면담 이정식·해설 김학준) 하지만 그런 평판은 시들해졌다. 장준하·김준엽은 이범석 장군 부대(광복군 제2지대)에 들어간다.

‘암살’은 김구와 김원봉의 제휴를 그린다. 그것은 허구다. 진실은 대립·갈등이다. 임정 내부는 복잡했다. 김원봉 세력은 좌파다. 장준하는 파쟁에 실망했다. “임정 내 각 정당에서는 우리에 대한 포섭공작을 했다··· 심지어 김원봉 일파에서는 미인계까지 쓰고 나서는 형편이었다.” (『돌베개』)

장준하의 개탄은 분노를 담는다. 일제의 패망 직후 상황에서다. “일군 출신(한국인 장병) 부대로 하여금 임정·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어부지리(漁夫之利)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 『돌베개』의 이 부분은 얼마큼 사실일까. 김성숙의 기억은 연관된다. “김원봉은 임정을 적극 반대했다. 내가 김원봉하고 굉장히 싸움을 해가지고 민족혁명당을 임정에 가담시켰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장준하의 환멸은 충격이다. ‘문재인 역사 공간’은 혼란스럽다. 그 속의 역사 코드는 파열된다.

김원봉은 1948년 4월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친일파 악질 경찰(노덕술의 고문)에 대한 증오 때문일까. 정화암 선생(혁신계 정치인, 건국훈장)의 분석이다. “김원봉은 남한에서 정치적으로 큰 무엇이 없겠고, 지난날 관계했던 대부분은 이북(연안파)에 있고 하니 갔을 거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북한은 조선의용대 역사를 망가뜨렸다. 대한민국은 그들을 기렸다. 김원봉의 항일 동지들은 잊히지 않았다. 석정 윤세주는 의용대 주축이다. 그는 건국훈장(추서 1982년)을 받았다. 박차정(김원봉의 첫 부인)에게도 건국훈장(추서 1995년)이 주어졌다.

김원봉은 다르다. 그의 월북 후는 치명적이다. 그는 김일성 정권의 국가검열상을 지냈다. 6·25 남침 때 전선 지휘는 아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요직이다. 군사 행정을 관장한다. 김원봉에게 전범(戰犯)의 그림자는 그렇게 서려 있다.

이종찬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의 제안은 통합이다. “기념관은 이승만·김구부터 김원봉까지 담는다. 김원봉은 독립운동 공로가 크고, 김일성에게 비참하게 숙청(1958년)당한 만큼 우리가 끌어안아야 한다.” 이종찬의 구상은 적절하다. 포용의 해원(解寃)은 대한민국이 해줘야 한다. 역사의 정통성이 한국에 있어서다. 하지만 김원봉에 대한 서훈(훈장 수여)까지는 불가다. 6·25 남침으로 한반도는 피로 물들었다.

11일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 여의도공원에서 광복군의 국내진공 장면이 재연된다. 74년 전 주역은 이범석·장준하·김준엽이다. 문 대통령은 “임정은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했다. 김원봉은 임정 노선을 오랜 기간 거부했다. 그것은 김구의 개탄이다. 독립훈장은 국가 정체성이다. 문 대통령은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고민할까. 장준하의 울분, 김구의 고통을 알고 있을까.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