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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의 골프이야기] “키신저가 ‘괴짜’라고 놀렸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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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는 골프를 치면서 해외여행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1980년대 초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초청받아 반년 이상 머물렀다.
당시 JP는 전두환 정부에 정치활동금지 조치를 받고 그의 표현대로 정계에서 추방당했다.

“그들은 정권을 찬탈하는 일종의 희생양으로 나를 부정축재자로 낙인찍어 내쫓고 그들의 정당성을 주장했죠. 부정축재라는 누명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아세요.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 지휘하의 연합군에 패배했어요. 소위 100일 천하가 종말을 고하고 나폴레옹은 급기야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돼 10여 년에 걸친 왕정이 끝났죠. 그때 웰링턴 장군에게 쏟아진 질문이 ‘어떻게 나폴레옹을 이겨낼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어요.
웰링턴 장군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어요. ‘나는 이튼 정신으로 싸워서 승리했다’고요.
이튼 정신이란 이튼 고등학교를 말하는 거죠. 바로 영국정신을 고등학생들에게 강력히 주입해 대영제국에 절대 충성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학교죠.”

JP는 이런 사실(史實)을 알고는 언젠가 자신도 ‘한국의 이튼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애국해서 조국의 영광을 가져오게 할 역군을 양성, 배출하도록 하리라는 큰 꿈을 안고 사범대학에 다녔어요. 그러나 1950년 6·25 이전에 육군사관학교로 전입, 장교가 됐죠. 때마침 6·25전쟁을 치르고 상처 속에 극빈 조국을 구제하기 위한 5·16 군사혁명에 가담한 뒤 정계에 투신하게 됐어요. 나는 초지를 잃지 않고 한국적 이튼 고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단이 필요함을 통감했죠. 뜻있는 지원자들의 협력을 얻어 1968년 제주도에 감귤단지를, 충남 서산에 한우목장을 설립했어요. 1978년부터는 제주도에서 과실이 나와 우선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됐어요. 그런데 전두환 일당들은 이것을 내 개인재산이라고 억지를 쓰면서 이미 사회에 희사된 재단을 강제 압수했어요. 나를 부정축재자라고 만천하에 떠들어댔던 것이에요. 그런데 전두환이는 무엇을 어떻게 했나요? 권좌 7년 끝에 그 자리를 물러설 때 수천억원을 챙겨 사복하고 교도소에 수감되지 않았어요.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이런 치욕에 대해 JP는 아직까지 일언반구도 해명하거나 원망 한마디 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대한민국의 재산으로 남았으니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허허…”하고 웃어넘겼다.
컬럼비아 대학에 갔던 이야기를 계속하자. 그가 학교에 도착하던 다음날 부총장이 학교를 안내해 광대한 캠퍼스를 돌아다닐 때 도서관도 들렀다고 한다.

“도서관의 지하층에 갔더니 저 구석에 걸린 이당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약 60호 크기)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동행 중이던 도서관장에게 이 그림이 어떻게 해서 여기 걸려 천대받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잘 모르겠다는 관장에게 조사해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이 작품이 밖에 나가면 수십만 달러는 족히 받을 거라 했더니 부총장이나 도서관장은 크게 놀라더군요. 다음날 도서관장이 들고 온 장부를 보니 ‘1948년 11월 Doctor JO’라고 적혀있습디다. 이 작품은 유엔총회에 사절단을 이끌고 갔던 조병옥 박사가 자신의 모교에 기증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그 후 이 작품은 지하실 구석에서 나와서 환하고 사람 많이 왕래하는 자리에 옮겨 게양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도 그림을 좀 그린다고 했더니 부탁하기에 주먹을 그린 소품을 부총장에게 선사했어요. 그 소품 설명에 ‘인간은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없는 삶에 대한 의지를 표현했어요. 평생을 살아가면서 기쁠 때도 서러울 때도 어려울 때도 분할 때도 주먹을 쥐고 의사 표현을 하게 되는 인생의 상징이니라’고 적어주었지요. 아마도 학교 어느 곳에 걸려있을 겁니다. 그때 나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뇌까렸어요. ‘전(두환) 장군 당신도 7년 안에 그 자리에서 쫓기듯 나와서 응당의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요. 결국 전씨는 그렇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내가 옹졸했던가 봐요, 허허….”

JP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뉘우쳤기에 헛된 기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아무튼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은 주로 ‘코요테’라는 컨트리 클럽에서 골프를 즐겼다. 그 옛날 코요테가 많이 출몰해 그런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골퍼들의 태반이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교포들이었는데요. 모두 70대 스코어로 프로 못지않은 골퍼들이어서 같이 치면서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추억에 남는 즐거웠던 기간이었어요. 늘 동반해서 우정을 돈독히 하던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 있었어요. 6·25전쟁에서는 노스아메리칸 무스탱 F51, 그 후 F86, 세이버 Z 전투기를 몰고 대한의 하늘을 지켜준 용장, 그리고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옥만호 장군이었죠. 훌륭한 애국자인데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렇게 즐기던 골프를 멀리하고 있지만 옛날 같은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기원해 마지않고 있어요.”

60년대에도 그는 미국에 머문 때가 있었다. 좀 길지만 JP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한·일 수교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청구권 문제였죠. 1951년부터 회담은 계속되었으나 그 어느 쪽 누구도 액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한국 측으로서는 액수가 많을수록 좋았으나 일본 측으로서는 적을수록 이익이라는 상반된 입장이었죠. 10년 여일하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서로 만나면 말꼬리나 물고 늘어지면서 비난하는 일로 허송세월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1962년 10월 미국 정부 초청으로 도미하게 되었죠. 돌아오는 길에 일본 외무대신과 맞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라는 박 대통령(당시 군사정부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훈령을 받았어요.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과 만나 ‘무상 3억 달러+ 유상(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1억 달러 이상의 α(알파)’라는 조건으로 기본 합의를 봤죠. 이를 양측 수뇌에 보고해 동의를 얻으면 한·일회담 수석대표들에게 각각 줘서 회담에서 정식으로 제기하고 합의한 뒤 최종 결정하기로 했었죠.

그래서 나는 ‘제2의 이완용’이라는 매국노로 취급당해 격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죠. 1964년 6월에는 급기야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는 사태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내가 사태의 과열을 막으려고 잠시 외유하기로 했어요. 미국 정부가 주선해 줘서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대학의 ‘키신저 특별코스 과정’에 참가하기로 한 거죠. 이 코스는 6개월 과정이었는데 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자 50여 명이 자리를 같이하여 저명한 정치학자(후에 미 국무장관) 키신저 박사의 명강의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2주쯤 지난 어느 날 키신저 교수는 하버드 대학은 200년 이상을 자랑하는 명문 대학인데 일찍이 유례가 없는 이상한 학생 아닌 학생 하나가 끼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배당된 연구실에 티셔츠 한 벌만을 걸어놓고 거기에 있지 않은 유일한 이단 수강생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워싱턴에 자주 드나들고 강의실에 올 때는 보디가드를 둘이나 양 옆에 앉히고 내 강의를 듣고 있는 괴짜가 있는데, 마침 오늘은 저기 앉아있으니 수강생 여러분 저 괴짜를 한번 보시오 라고 해요. 그래서 모두의 폭소를 자아냈죠. 나는 하는 수 없이 변명을 했어요. 키신저 교수님 내 옆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보디가드가 아니라, 제가 워싱턴에 가서 하는 일에 필요한 통역관들이라고 했죠. 일은 중요하고 저의 영어는 서투르니 이런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같이 다닌다고 했어요. 키신저 교수는 양해를 한다고는 했지만 뒷맛은 씁쓸하기만 했었지요.

그때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 의원들 특히 닷드 위원장(코네티컷주 출신)을 만나 한국군의 월남파병 문제를 상의하고 전체위원회에서 설명을 하면서 보스턴과 워싱턴을 내왕했죠. 대략 기초적인 내용에 도달했을 때 박 대통령께 보고드리고 한·미 간 정식외교 채널로 하여금 논의하도록 건의했죠. 급기야 월남 파병이 이뤄졌던 것이에요. 그래서 하버드에 머물었던 반년 동안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어요.” <계속>

김시래 기자 (sr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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