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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의원 사건」 수사 보안 지나치다|김종선 <사회부 차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경원 의원의 밀입북, 전대협 대표의 평양행 등으로 도대체 지금 이 나라가 어디로 향해 가려고 이러는지 갈피를 잡기 힘든 요즈음이다.
우리가 지난 40여년간 값있다고 생각하고 지켜온 모든 가치·법체계·제도 등이 한꺼번에 도전을 받아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기까지 한다.
김일성을 몰래 만나고 온 국회의원이 잡혀 가면서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고 학생들이 「임수경 학우를 남한 학생 대표로 평양에 파견했다」고 당당히 발표하기에까지 이르러 온통 충격과 위기감에 휩싸인 국민들 사이에는 국가 존립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곤두박질치는 주가가 이러한 불안을 반증하는 것이며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시국 한파」 로 경기가 동사 직전이라고 아우성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고 어느 곪은 부분을 도려내야 할지 분간조차 어렵다고들 한다.
공안 당국이 이 어지러운 사건의 연속 속에서 사회 안녕·질서를 유지키 위해 뒤늦게나마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나서 다행스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수사 과정 등을 지켜보노라면 5공 시절의 공안 수사를 보는 것 같아 한편으론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전의 일이다.
치안 본부 대공 분실과 각 시·도경 대공 분실은 이른바 「혁명 공채 사건」과 같은 굵직굵직한 공안 사건 수사 결과를 경쟁적으로 터뜨리기 시작했었다.
매스컴들은 관련자들의 반론이나 항변은 들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연일 수사 당국이 건네주는 수사 결과만을 대서 특필했다.
독자들이 「설마」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조차 수사 당국·매스컴은 외면한 꼴이었다.
결국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의 입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보였던 「혁명 공채 사건」은 장난 삼아 한 대학생이 노트에 긁적거린 것을 수사 기관이 확대한 것으로 밝혀지기까지 해 수사의 신뢰성은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었다.
이전부터 국민들 사이에 「용공 조작」이란 말이 번지기 시작하다 결과가 엉뚱하게 밝혀지자 수사 당국의 수사 결과에 대한 설득력은 그 힘을 잃게되고 만 것이다.
현재 안기부가 수사중인 서 의원 밀입북 사건을 지켜 보느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사 결과에 자칫 흠 잡힐 일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서 의원 사건 등 잇단 충격으로 국민 불안이 어느 때보다 고조돼 서 의원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수사상 보안의 필요성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보안 유지가 자칫 수사 결과에 대한 신빙성을 잃게 한 전례를 너무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이번 수사에서도 그런 점이 걱정되는 것이다.
현재 각 언론사가 서 의원 사건 수사 진전 상황을 추적하는 것은 관련자들의 구속 영장 내용을 확인하고 청와대·민정당·검찰 등을 문이 닳도록 들락대며 간접적으로 전해듣는 연행자 명단 등을 토대로 한 것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결국 기자들은 수사 진전 상황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국민들을 위해 갖가지 방법을 통해 취재에 애를 쓰고 있으나 지금까지도 5공 시절의 수사 관행을 버리지 못한 공안 당국의 폐쇄성 앞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안기부의 수사를 지휘할 권한을 가진 검찰도 안기부가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연행자 인적사항 등만 흘려주는 「대변인」 역할에 그치는게 고작이다.
물론 현직 국회의원인 서 의원 입북 사건이 남북 분단이라는 엄연한 현실 아래서 국기를 흔들 수 있는 사건이라 여느 사건 수사보다 보안이 절실하리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현재 이 사건 관련 구속자 10명 중 서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은 모두 불고지죄로 구속됐고 더 이상의 혐의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수사의 보안을 지키겠다는 뜻도 사건 진상을 캐기 위해 신병 확보가 급선무이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짐작은 간다.
그러나 지난날 공안 당국은 지나치게 힘에만 의존하거나 때로는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합리와 형평을 저버려 국민 불신을 받은 일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수사 결과가 높은 신뢰성을 얻기 위해서는 공개적이고 적법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
국민의 온 시선이 공안 당국의 일거일동에 집중된 채 갈피를 못 잡고 불안해하는 이 마당에 알맹이는 감춘 채 불고지 혐의만으로 잇달아 구속하는 것은 불고지죄의 성립 여부에서부터 시작해서 왠지 찜찜한 느낌을 국민들에게 줄 우려가 있다.
이번 수사를 계기로 공안 당국은 일관된 수사 잣대와 정확한 사실 증거 확보로 결과에 자신을 가질 수 있는 수사를 한다는 국민적 신뢰를 쌓아야 한다.
엄청난 수사 결과가 발표된다 하더라도 수사 과정이 밀폐 됐을 경우 그 결과를 의심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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