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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갖는 게 쿨한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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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프랑스에서 서너 명의 닮은꼴 아이들이 줄줄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다면 옆 사람과 내기를 해도 좋다. 그들은 베르사유에 산다. 미니밴에서 네댓 명(때론 대여섯 명)이 우르르 내린다면 더 볼 것도 없다. 열이면 열, 베르사유 사람이다.

베르사유 주민들은 콧대가 높다.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 세계 정치.외교.문화의 중심지에 산다는 자부심이다. 실제 베르사유 주민 중에는 귀족 출신이 많다. 그들에게 아이를 갖는 행위는 자랑스러운 가문을 빛내는 일,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신이 타락한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을 벌로 준 뒤 여성에게 출산은 전쟁과 다름없었다. 성경은 분만에 맞서는 여성의 용기를 전장에 나가는 남성의 용기에 견준다. 이슬람에서도 출산 중 목숨을 잃는 산모는 순교자로 간주됐다. 아스텍인들 역시 출산하는 여성을 전쟁 영웅으로 대접했다.

이런 출산의 고통과 위험을 감추기 위한 생물학적 장치가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조용한 배란'이다. 배란기가 분명히 드러나면 영리한 여성들이 가임기간에 섹스를 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자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20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의 투쟁으로 피임이 합법화됐다. 한 세기 전에 나온 맬서스의 과장 섞인 '인구론' 덕이 컸다. 기존의 권위적 질서에 반기를 든 68 학생운동도 한몫 거들었다. 결혼 대신 혼전 동거가 유행처럼 번졌다. 출산율은 바닥을 그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베이비 스트라이크'는 온 산업국가들로 퍼져나갔다. '불임국가'의 위험에 처한 나라들이 화들짝 놀라 온갖 출산장려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효과는 별무한 실정이다.

프랑스는 그나마 성공 사례로 꼽힌다. 애 안 낳기 대표격이던 나라가 유럽 2위 다산국가로 올랐다. 각종 유인책 덕이다. 저소득층에는 육아수당, 중산층에는 연금 수혜가 가능한 근로연한을 깎아 주는 정책이 먹히고 있다. 하지만 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다른 나라라고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프랑스 사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파리의 거리는 진한 애정표현을 하는 청춘남녀들로 넘쳤다. 그런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파리에서 뽀뽀할 수 있는 곳'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혼전 동거도 많이 사라졌다. 대신 '팍스(PACS)'라 불리는 '제3의 결혼' 형태가 늘었다. 팍스는 원래 동성애 커플을 위한 제도지만 헤어질 때 법적 부담이 작아 이성 커플들도 선호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 동거 커플과 달리 아이를 낳는 걸 꺼리지 않는다. 2002년 태어난 아이들 중 거의 절반이 결혼 외 결합 커플에서 나왔다.

예전 커플이 부모로서의 책임보다 자유로운 섹스를 원했다면 이제는 사랑의 결실을 위해 기꺼이 부모가 되려는 커플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아이를 갖는 게 '쿨(cool)'하게 인식되는 사회가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족계획사업은 아이를 적게 낳은 것이 현대적이라는 정치적 담론을 생산했다. '싱글족' '딩크족'이 공연히 세련돼 보였다. 은연중에 불임을 권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불임을 치유하는 데 각종 지원 등 출산 유인책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아이와 함께 걷는 게 쿨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야 한다. 육아를 돕는 남자를 팔불출로 보는 시각이 바뀌면 도움이 될 법하다. 출산은 물론 육아까지 여성에게만 맡긴다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남자가 애를 낳았다면 마초(macho)가 득실대는 지구에서 육아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우스개로 치부하기 어렵다. 이노구치 구니코(猪口邦子) 일본 저출산담당상은 "남자들이 가사를 돕도록 설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단언한다.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즐겁게 손뼉 치는 멋진 아빠들이 늘어야 '가문의 영광'도 가능한 것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