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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힐의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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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효식 기자 중앙일보 사회부장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

크리스토퍼 힐 전 아태담당 차관보(67)가 지난주 통화에서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동향보다 한·미동맹을 걱정했다. “미국이 남북관계에 끼어들어 한반도 긴장 완화를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동시에 한국도 동맹 미국과 다른 길을 가는 것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에둘러 얘기했지만 한국이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비핵화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우선하는 다른 길로 간다는 뜻이었다. 그는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같은 남북문제에 대해 한국이 더 나은 연출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한국이 미국과 다른 길을 간다는 시각은 워싱턴에선 공공연하게 퍼졌다. 하노이 회담 결렬에 남북협력 사업을 재촉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확증이 됐다. 친한파로 꼽히는 베테랑 외교관인 힐이 “나도 솔직히 비핵화에 움직임이 없는 상황에서 남북관계가 앞서가는 게 불편하다”고 밝힐 정도다. 문 대통령의 중재자론도 “중재자란 기본 전제가 미국과 다른 입장에 있는 제3자를 의미하는 데 미국과 동맹이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지 거북하다”고 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한국은 미국의 동맹인 플레이어이지 중재자가 아니다”라고 한 것과 똑같은 불신을 표출한 셈이다.

힐은 대북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볼턴은 협상과 외교를 믿지 않는다. 힘에 의한 굴복만 원한다”고 대놓고 비판하는 이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회담에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일괄타결식 ‘빅딜’을 선택하며 아무 합의도 이루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협상론자이기도 하다. 여전히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라는 북한 제안은 의미가 있으며, 단계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그가 북한과 협상 재개보다 동맹 외교의 실종부터 우려했다. 지난해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와 달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하노이 결렬 이후 서울을 들르지 않고 강경화 외교장관과 전화통화만 해서 놀랐다고 했다. 동맹 간 공조가 어긋나기 시작한 신호로 본 것이다. 실제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폼페이오와 강 장관은 한·미 외교장관 회담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폼페이오 쪽에서 아이오와·텍사스 및 고향 캔자스주 등 미 국내 투어로 바쁘다고 거절해서다. 하지만 한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빅딜’을 인정하지 않고 북한이 아니라 먼저 미국을 설득하겠다고 하니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속내가 깔렸다. 미국이 우리 외교수장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은 단순한 정책의 실패가 아니다. 자칫 심각한 외교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