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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크로’로 티켓 싹쓸이, 온라인 암표 거래 처벌 못한다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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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호 02면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공연 티켓 시장에 온라인 암표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웬만한 ‘피켓팅(‘피튀기는 티켓팅’이라는 뜻의 속어)’으로는 구하기 어렵다. 차익을 노리고 중고 사이트에서 속칭 ‘플미티켓(프리미엄 티켓)’으로 되파는 암표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 티켓 온라인 암표 대란 #암표상, 순식간에 선점해 2차 거래 #워너원 콘서트는 3000만원 호가 #오프라인선 암표 걸리면 벌금 부과 #온라인 거래는 규정 없어 처벌 못해 #매크로 방식 예매 무효화하거나 #미국처럼 강력 처벌 법 만들어야

김준수가 출연하는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지난 14일 선예매 오픈과 동시에 서버가 다운되고 순식간에 매진된 뒤 곧바로 2차 거래가 시작됐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조승우 출연분은 VIP석 정가가 14만원이지만 2차시장에서 최저 18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희귀 공연일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다. 지난해 BTS의 월드투어 서울 공연은 장당 480만원, 지난 1월 활동을 종료한 워너원의 마지막 콘서트는 3000만원을 호가했다.

사기 피해까지 발생하고 있다. 지난 16일 중국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돌 콘서트 티켓 구매 대행 트위터 계정 ‘메이다니’는 계정을 폭파시키고 잠적했다. 엑소 첸백시의 4월 말 일본 공연을 보러 갈 예정이던 회사원 조모씨는 “정가 10만원대 티켓을 사기 위해 42만원을 입금한 나는 그나마 피해가 덜한 편”이라며 “BTS 월드투어 관람 예정이던 팬들은 100만~1000만원 피해를 호소하고 있고, 지난 16일 박보검·옹성우 등의 해외 팬미팅에 나섰던 팬들은 태국·홍콩까지 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왔다”고 전했다. 메이다니 피해자 단톡방에 가입한 400여 명의 피해액은 수억원대로 추산된다.

공연법 개정안 등 관련 법안 국회서 낮잠

아이유

아이유

암표상들은 컴퓨터 프로그램 ‘매크로’를 써서 티켓을 대량 확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매크로는 엑셀 프로그램 등에서 반복작업을 자동화하는 편리한 기술이지만, 악용되는 사례가 많다. 지난해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이미 2000년대 초반 게임업계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매크로를 이용, 하루 종일 게임을 시켜 랭킹을 올리는 수법이 횡행했다. 대학에서도 골칫거리다. 수강 신청시 인기 강의를 선점한 뒤 웃돈을 붙여 되파는 일까지 있다. 주가 조작 사례도 있다. 특정 종목의 단주 매매를 반복해 투자자를 유인하는 수법으로 5년간 39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일당이 지난해 검거되기도 했다.

공연 예매시에도 로그인부터 좌석 선택을 거쳐 결제창에 도달하기까지 경로를 자동으로 처리해 주는 게 매크로다. 온라인에서 단돈 5000원이면 프로그램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됐고, PC방 차원에서 매크로를 돌려 암표를 팔기도 한다. 대리 티켓팅도 흔하다. SNS나 각종 중고 거래 사이트에는 인기 공연 티켓을 대신 사주겠다며 개인 연락을 유도하는 호객 게시물이 즐비하다.

예매 사이트에서는 보안문자 입력, 1인당 구매 매수 제한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큰 효과가 없는 실정이다. 현재 공연 예매 시장의 70%를 점유 중인 인터파크 측은 “매크로를 이용한 구매가 정의롭지 않으나 제재할 법이 없다”며 “부정 예매 방지를 위한 기술 투자를 하고 있지만 개별 기업이 완벽히 차단하기 어렵다. 법 제도와 시민 의식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한다.

김준수

김준수

‘플미티켓’이 판치는 건 매크로를 이용한 티켓 구매가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표 거래는 불법이지만 오프라인에서 암표를 팔다 적발될 경우 경범죄처벌법으로 건당 2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정도다. 온라인 거래는 관련 규정이 없고, 암표거래 여부를 입증할 수 없어 사실상 처벌할 수 없다. 20대 국회에서 ‘공연법 개정안’등 암표 근절 관련 법안이 10건 가까이 발의됐지만 모두 계류 상태다.

김성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매크로 티켓 선점을 “관행적으로 미미하게 있어온 암표 거래가 사이버로 오면서 지능적으로 범죄화한 문제”로 정의한다. 김 교수는 “시장 자체가 왜곡돼 실수요자가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얻을 수 없는 상황이다. 불로소득을 얻는 사람들이 생기면 공급자·수요자 모두 피해를 보게 되고 결국 사회적 신뢰를 깨는 매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식칼을 강도가 쓰면 흉기가 되듯, 중립적인 기술도 사익을 극대화하고 타인에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간다면 사회적 흉기가 된다. 규제가 필요한 시점인데, 식물 국회가 정쟁에 바빠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민생법안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법제도가 미비한 현시점에서 실수요자는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걸까.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용 충남대 교수는 “민법상 티켓대행업체와 이용자 간 계약을 통해 채무불이행 책임을 해석에 의해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도구 사용의 불평등 문제로 이용자들 사이에 구조적인 차이가 생기니 민법상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한 차별적 행위라 비난할 순 있지만, 현재로선 특별법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매매계약 자체를 무효라고 할 순 없다. 다만 예매 사이트에 ‘매크로 사용금지’라는 이용약관이 있다면 효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그 밖에 가능한 방법이라면, 이용자가 예매 사이트를 상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내가 대행업체를 통해 티켓을 매수하기 위해 가입했으니 대행업체는 정당한 방법으로 적절하게 티켓매수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는데, 상황을 방치한 결과 정상적인 방법으로 매수할 수 없다면 넓게 해석해 대행업체에 채무불이행 책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교수의 해석이다.

인터파크 “제도·시민의식 동반돼야”

그는 입법 정책에 대해서도 “헌법상 영업의 자유와 계약자유의 원칙도 제한할 수 있다. 그런 법안이 나올 수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유라는 기본권도 헌법 37조 2항으로 제한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정부가 공공복리를 위해 매크로 방식에 의한 계약체결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계약을 무효화시킨다든가 위법행위로 봐서 벌금을 매긴다든가, 사업자에게 그런 행위를 금지할 의무를 부과하고 의무 위반 시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행정벌을 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실수요자가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건강한 공연 관람 환경 조성’을 법제도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김성철 교수는 “규제만 하면 비용이 더 많이 들 수 있다. 시민의식을 계도하는 노력이나 기술적으로 막는 장치도 필요하다. 다각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업계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뮤지컬계는 지난 1월 한국뮤지컬어워즈 시상식에서 티켓 구매 매수 제한과 신분증 확인 등 협회 차원에서 불법거래 근절 캠페인을 시작했다. 지난해 아이유·김동률·H.O.T 콘서트 등은 매크로 계정 색출 작업을 벌여 조치를 취했다.

팬덤의 자발적인 정화운동도 있다. ‘김준수 골수팬’을 자처하는 주부 한모씨는 “암표를 사는 게 문제”라며 “우리는 팬사이트를 중심으로 ‘안티 플미운동’을 벌이고 있다. 진정한 팬덤 사이에는 플미티켓 거래가 아티스트에게 해가 된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티켓팅 기간에 SNS 플미 계정들을 바로 신고하고 팬덤이 이를 공유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미국은 매크로 방식 예매 규제, 일본은 실수요자만 사게 ‘환불 불가’

공연 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정한 티켓 예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16년 뉴욕주가 매크로 프로그램인 ‘티켓봇’을 이용한 구매자에게 최대 1000달러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하기로 하는 등 매크로 예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추세다.

영국에서는 공연장별 예매가 일반적이다.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은 “티켓 판매 주체를 분산시키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며 “근본적으로 특정 예매 사이트에 집중된 것이 문제다. 어느 한 군데를 공략하면 모든 티켓이 점유되는 상황이니 사재기와 암표에 대한 위험부담을 키운다. 공연장과 에이전트에 적절한 비율로 분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공연 티켓에 ‘환불 불가’를 명시하고 있다. 애초부터 실수요자만 예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취소가 부득이한 경우 합법적인 2차 판매시장에 팔면 큰 손해를 보지 않는다. 안호상 원장은 “시작과 함께 가치가 상실되는 공연이라는 상품의 특성상 해외에서는 대부분 환불 규정이 엄격하다. 한국은 공연 전날까지 어느 정도 페널티만 내면 환불이 가능하니 암표 거래의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열려 있다”고 지적했다.

티켓 구매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도 있다. 티켓 발권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해 구매자의 고유 정보를 티켓에 심어 불공정 거래를 차단하는 새로운 개념의 예매 플랫폼이다. 미국의 업그레이디드, 네덜란드의 굿츠, 중국의 바이두, 캐나다의 슬래틱스 등 해외에서는 이미 경쟁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아시아 아티스트 어워즈(AAA) 등 대형 이벤트에 블록체인과 안면 인식 기술을 접목한 ‘페이스티켓’이 선보였다.

한정호 공연평론가는 “올해 기업들이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만큼 혁신적인 티켓 예매 플랫폼의 등장도 기대할 만하다”며 “공연계에 관련 전문가가 없는 게 문제다. 매크로를 낡은 기술로 만들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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