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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안중근의 나라, 일본식민지 된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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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서 1년간 연수한 중앙일보 대중문화팀 정현목 기자, 한국영화 전공의 나리카와 아야 칼럼니스트(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한일간 이슈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누는 '한남(韓男)일녀(日女)수다'. 11번째 토크의 주제는 유관순 열사 영화 '항거'를 계기로 본 양국간 과거사 문제입니다. 한일병합이냐 한일병탄이냐, 용어부터 양국 입장차가 드러나고, 일제강점기를 보는 왜곡된 시선도 존재하지만, 과거사의 앙금은 반드시 털어내고 함께 미래로 가야한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겁니다. 물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전제로 말이죠.



나리카와 아야(이하 나리카와)= 한달 전에 아사히신문 선배가 친구들과 놀러와서 가이드를 해줬는데, 3·1운동 100주년이고 해서 서대문 형무소에 같이 갔어요.

정현목(이하 현목)= 뜻깊은 장소에 갔네요. 반응이 어떻던가요?

나리카와= 이 곳이 한일병합 이전에 세워졌다고 하니까, 일행 중 한 명이 '한일병합이 뭐에요'라고 하더군요. 더 이상 설명을 이어갈 수 없었어요. 징용·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한국에 대해 "이이카겐니시로(적당히 좀 해라, 언제까지 그럴 거냐)"라고 비난하는 일본인들이 있는데, 식민지배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러는 경우가 많아요.

 지난해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시민들이 태극기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시민들이 태극기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목= 일제침략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교육의 현실이군요.

나리카와= 아사히신문 선배는 한국에 관심 많은 분인데도, 형무소를 둘러본 뒤 이렇게 많은 조선인들이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됐는지 몰랐다고 하더군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될 때 별 저항이 없었다고 알고 있었나 봐요.

현목= '병합'은 일본 측 입장이고, 우리 입장에선 한일 '병탄'이에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해 집어삼켰다는 의미.

나리카와= 유관순 열사를 다룬 영화 '항거'를 봤는데, 젊은 여성들이 대거 만세운동에 나선 걸 보고 놀랐어요. 그들이 목숨 걸고 만세운동에 나선 이유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저는 나라를 위해 왜 목숨까지 걸어야 하나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어서 ^^ 대부분의 일본사람들도 그럴 거에요.

영화 '항거'에서 유관순 열사(고아성)가 옥중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영화사 제공]

영화 '항거'에서 유관순 열사(고아성)가 옥중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영화사 제공]

현목= 지배층이 무능하고 썩었어도 나라는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이 남녀노소 할 거 없이 한국사람 피에 흐르고 있어요. 임진왜란 때 의병,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구한말 의병 등이 그 증거죠.

나리카와= 3·1절을 앞두고 일본 외무성이 한국거주 일본인과 일본 관광객들에게 위험하니 집회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일본 언론도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 거세지고 있어 위험하다고 보도했어요. 하지만 여기 사는 일본인 입장에서 그런 위험은 전혀 못느끼고 있거든요. 일본 친구들도 호들갑스런 외무성 경고에 '웃기고 있네'라는 반응이에요. 일본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을 반일(反日) 국가로 몰고가는 것 같아요.

현목= 그게 어제 오늘 일인가요? 그건 그렇고 일본 사람들도 알만한 한국 독립운동가가 있나요?

나리카와=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인물로 교과서에 나와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를 이끈 리더로 추앙받고 있죠. 한국에서의 평가는 반대지만.

안중근 의사 [중앙포토]

안중근 의사 [중앙포토]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 [중앙포토]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 [중앙포토]

현목= 조선을 야금야금 집어삼킨 침략의 원흉이죠. 일본 입장에선 안중근이 테러리스트지만, 우리 입장에선 국권을 빼앗은 원흉을 단죄한 영웅이에요.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 '정한론'(征韓論·1870년대를 전후해 일본 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조선 침공론)의 창시자인 요시다 쇼인이잖아요.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나리카와= 아베가 총리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이 요시다 쇼인의 묘소 참배였어요. 안중근이 일본 간수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했고 그에 감화된 간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중근을 좋게 평가하는 일본인도 있어요.

현목= 개인적으로 더 알고 싶은 독립운동가가 있나요?

나리카와= 김원봉과 박열. 영화 '암살' '밀정' 그리고 '박열'을 통해 두 사람을 접하고 관심 갖게 됐어요. 둘다 북한과 관련된 부분 때문에 한국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일제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무장항일운동가 약산 김원봉

일제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무장항일운동가 약산 김원봉

현목= 김원봉은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의 쌍두마차로 불리며 일제를 벌벌 떨게 한 무장항일운동가인데, 해방 후 북한정권 탄생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대접을 못받고 있어요. 일왕 암살 모의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박열은 한국전쟁 때 납북돼 1990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됐죠.

나리카와=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조승우)이 초에 불을 붙이면서 이름없이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을 호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영화를 통해 되살아난 김원봉이나 박열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물들이죠.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 [영화사 제공]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 [영화사 제공]

현목= 잠깐… 나리카와상 혹시 재일동포세요?(웃음)

나리카와= 아뇨. 한국인 못지 않게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입니다 ^^  영화 '박열'이 올초 일본에서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는데 엄청 잘돼고 있어요. 일제에 온몸으로 항거한 아나키스트 부부의 국적을 초월한 사랑과 신념, 그들의 삶 자체가 드라마잖아요. 일본에서 두 사람에 대한 연구를 정말 꼼꼼하게 오래 해왔어요. 이준익 감독도 영화 만들 때 일본 자료를 많이 참고했고요. 식민지배를 반성한다는 의미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도 많아요.

영화 '박열'에서 박열(이제훈)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가 함께 수감돼 있는 모습 [영화사 제공]

영화 '박열'에서 박열(이제훈)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가 함께 수감돼 있는 모습 [영화사 제공]

1925년 도쿄 형무소에서 일왕과 왕세자 암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을 당시 찍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박열기념관 제공]

1925년 도쿄 형무소에서 일왕과 왕세자 암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을 당시 찍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 [박열기념관 제공]

현목= 우리가 해야 할 연구를 일본에서 더 꼼꼼히 하고 있다니, 창피해지네요. 저도 영화 '박열'을 보기 전까지 가네코 후미코 여사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조선에서 태어나 박문자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일제와 싸우다 숨져간 분인데. 일본에선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도 꽤 활발하죠?

나리카와= 그럼요. 얼마전 일본에서 열린 윤동주 추모행사에 다녀왔는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윤동주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독립운동가 송몽규에 대한, 흥미로운 팩트를 알려줬어요. 송몽규의 교토대 입학원서를 찾아냈는데, 창씨개명한 이름 宋村夢奎를 읽는 방법이 흔히 알려진 '소우무라무케'가 아닌, '쿠니무라무케'로 돼있더래요. 宋을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쿠니라고 읽을 순 있지만, 그걸 아는 일본인은 거의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했지만, 일부러 일본인이 읽기 힘든 이
름으로 한 게 아닐까 라고 그 교수가 말하더군요.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 역을 맡은 배우 박정민 [영화사 제공]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 역을 맡은 배우 박정민 [영화사 제공]

현목= 그것 또한 일종의 저항으로 볼 수 있겠네요. 독립운동가들의 세세한 팩트들을 일본 학자들이 더 잘 알고 연구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창피해집니다. 더 창피한 건, 일본의 식민지였던 덕분에 조선이 근대화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는 한국 학자들이 잊힐만 하면 등장해 사람들을 열받게 한다는 사실. 일본에 있을 때 "조선이 청나라나 러시아의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게 다행 아닌가"라는 황당한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요.

나리카와= 일본이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의 열악한 위생상태를 개선하고, 교육수준도 올리고, 산업도 육성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지식인들이 많아요.

현목= 조선의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한 건 인정하다 쳐도,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나쁜 의도와 결과적으로 조선인들의 삶을 향상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떼강도가 남의 집에 침입해 집안에 있는 재료로 맛난 음식을 아무리 많이 만든다 해도, 그걸 먹는 건 인질이 된 집안 식구들이 아니라 떼강도라는 거죠.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한국 학자들의 궤변은 과거 일본의 잘못을 부정하는 일본 관료들의 망언 만큼이나 해악이라고 생각해요.

나리카와= 일부 일본인들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조선이 잘살게 됐다고 생각하는 건, 가해자 콤플렉스 아닐까요?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좋은 일 했다고 합리화하는 심리. 일본이 조선에서 쌀을 수탈해갔지만, 그 때 일본에선 굶어죽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그 쌀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일본 서민들도 고통받았어요.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잖아요.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현목= 한국에서 반일 영화가 봇물 터지듯 나온다고 비꼬는 기사도 일본에서 봤는데 많이 불편해요.

나리카와=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들이 반일정서를 부추긴다는 기사를 저도 봤어요. 전 생각이 달라요.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사를 조명하는 영화들이 나오는 건 의미가 있다고 봐요.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재단하지만 않는다면요. 제가 영화 '박열'을 높게 평가하는 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인들을 위해 변론해줬던 일본인 변호사의 활약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는 점도 커요. 일본인을 무조건 악마로만 묘사하는 영화는 보기 불편해요.

현목= 일제강점기가 패배의 역사가 아닌, 투쟁의 역사였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들은 칭찬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역사를 왜곡('덕혜옹주')하거나 무리하게 항일운동 얘기를 갖다붙이는('자전차왕 엄복동') 영화는 유감스러워요. 참, 그거 알아요? '명량'의 후속작 '한산'과 '노량'이 만들어진다는 거.

나리카와= 사실 '명량'도 실망스러웠는데… 일본어 대사도 개판이고, 고증도 제대로 안됐고…

영화 '명량'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순신 장군(최민식) [영화사 제공]

영화 '명량'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순신 장군(최민식) [영화사 제공]

현목= 저도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라 생각하지만, 일본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

나리카와= 영화 만듦새가 실망스럽다는 얘기입니다만 ^^

현목= 앞으로 이순신 장군 영화를 만든다면 잘 몰랐던 부분을 재조명하거나 다른 관점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성웅 이미지만 너무 울궈먹지 말고. 그런 점에서 전 '명량' 후속작보다는,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은 함선 거북선의 활약과 비밀에 집중하는 영화 '귀선'이 더 기대됩니다.

나리카와= 저도 '귀선'에 한표!

현목= (의심의 눈초리로) 아무래도 나리카와상,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 같은데…

나리카와= ㅍㅎㅎㅎ 그냥 웃지요 ^^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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