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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도 없이 국회서 '겐세이' '분빠이' 외친 국회의원 누구?

중앙일보

입력

일본 도쿄에서 1년간 연수한 중앙일보 대중문화팀 정현목 기자, 한국영화 전공의 나리카와 아야 칼럼니스트(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한일간 이슈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누는 '한남(韓男)일녀(日女)수다'. 8번째 토크의 주제는 일제탄압 하에서도 조선어를 지키려했던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을 다룬 영화 '말모이'입니다. 영화를 계기로 양국의 언어습관의 문제점을 짚어보았습니다. 우리말에 깊숙히 침투해 발음 뿐 아니라 뜻도 이상하게 변해버린 일본어, 원어민도 이해 못할 해괴한 일본식 영어 등 언어로 인한 고민은 동병상련인 듯 합니다.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정현목(이하 현목)= 영화 보고 느낀게 남달랐을 듯.

나리카와 아야(이하 나리카와)= 크게 두 가지. 끝까지 조선말로 시를 썼던 윤동주 시인이나 사전을 만들려했던 조선어학회 사람들이나 글로 독립운동 하신 분들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일본영화에도 사전만들기 프로젝트를 다룬 ‘행복한 사전’(2014, 이시이 유야 감독)이 있었죠.

현목= 저도 재미있게 봤던 영화에요.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사전편찬을 통해 고귀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얘기잖아요. 둘다 사전 만들기지만 ‘말모이’가 훨씬 더 절박하죠. 일제 탄압하에서 목숨걸고 우리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희생이니까.

영화 '행복한 사전'의 한 장면

영화 '행복한 사전'의 한 장면

나리카와= 조금 아쉬웠던 건 조선어학회 탄압에 반대하는 양심적 일본인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

현목= 그런 것까지 담아내려면 영화가 너무 길어지고 플롯도 복잡해져요.

나리카와= 물론 그렇지만, ‘동주’(2016, 이준익 감독)가 좋았던 건 윤동주를 취조하던 일본형사의 내면의 갈등을 잘 그려냈기 때문이거든요.

말은 곧 영혼, 일제가 조선어 말살하려 했던 이유  

현목= 아주 인상적이었죠. 일제가 조선어를 없애려 한 건,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서였죠. 말은 곧 영혼이니까. 해방이 되자 어른들은 감춰뒀던 태극기를 들고 나가 만세를 외쳤지만, 우리나라가 망했다며 슬퍼했던 어린이들도 있었대요. 일본인 교사 밑에서 일본말로 교육받았으니 일본이 조국인 줄 알았던 거죠. 우리 말을 잃는다는 게 그만큼 위험하고, 비참한 일인 거죠. 나리카와 상은 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나요?

나리카와= 한국영화를 너무 좋아했는데, 자막 없는 게 너무 많았어요. 한국영화를 자막없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에 배우기 시작했죠. 한국어학당 2년, 교환학생 1년, 통번역대학원 2년 등 정규과정은 5년 배웠지만, 영화 보고 한국친구 사귀고 취재하면서 배운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현목= 뭐니뭐니 해도 가장 빠른 외국어 습득법은 연애죠 ^^

나리카와= 인정. 처음 사귄 한국인 남자친구는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거든요.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울 수 밖에 없었어요.

현목= 한국어의 어떤 점이 좋게 느껴지나요?

나리카와= 한자가 아닌 고유어의 부드러운 느낌이 좋아요. ‘말모이’란 제목도 그렇잖아요. 일본은 어떻게든 한자가 들어가거든요.

현목= 키보드 입력도 한글이 더 쉽고 빠르지 않나요?

나리카와= 맞아요. 한국에 어학연수 갔다가 고베대 법대에 복학했는데, 강의를 받아적을 때 법률용어는 한글로 썼어요. 그게 빠르니까. 친구들이 일본어로 강의듣고 노트는 한글로 하냐며 웃었죠.

현목= ㅎㅎ 한국말에 침투해있는 일본어 표현들이 참 많아요. 황당한 일본어 표현들 많이 듣지 않나요?

나리카와= ‘유토리’(여유)를 융통성이란 뜻으로 쓰던데, 그런 뜻 전혀 없어요. ‘노가다’는 ‘도카타’(건설현장 인부)가 변한 말이고.

현목= 언론계에도 진짜 많아요. 사츠마와리(취재를 위해 경찰서를 주기적으로 도는 것), 하리코미(잠복 취재), 나와바리(관할구역) 등등.

이자카야 이름이 '나와바리'라니… ㅍㅎㅎㅎ 

나리카와= 경찰이란 뜻의 ‘케이사츠’를 줄여서 ‘사츠’라고 해요. 기자들의 은어죠. 나와바리는 일본 언론에선 안 써요. 야쿠자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냥 ‘탄토’(담당)라고 하죠. 여기서 본 이자카야 가게이름이 ‘나와바리’여서 엄청 신기했어요 ^^

현목= 기자생활하면서 수도 없이 듣는 게 ‘야마’거든요. 선배들이 후배 기사를 데스킹할 때 ‘도대체 야마가 뭐야’라고 늘 묻거든요. 핵심 메시지 정도의 의미?

나리카와= 일본 기자들은 야마란 말 안 쓰는데, 신기하네요.

현목= 당구 용어에도 많아요. 대표적인 게 뽀루꾸.

나리카와= ?? 첨 들어보는데.

현목= 운좋게 맞는 건데, 요행이란 뜻의 영단어 ‘fluke’가 일본에서 후루쿠로 바뀌었고, 한국에서 뽀루꾸로 2차 변용된 것 같아요 ^^

나리카와= 분배라는 뜻의 ‘분빠이’가 한국에선 ‘와리캉’(더치페이)의 의미로 쓰이던데, 그런 뜻 전혀 없어요.

국회에서 '분빠이' '야지' '겐세이' 외친 한국 국회의원

현목= 분빠이 하니까 생각났는데,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분빠이’‘야지’‘켄세이’등 일본말을 써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어요.

나리카와= 저도 기사보고 엄청 웃었어요. 야유란 뜻의 ‘야지’는 많이 써요. 그 의원님이 “왜 위원장이 겐세이 놓느냐”며 항의했다던데, 견제라는 뜻의 ‘켄세이’는 일반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에요.

현목= 겐세이는 훼방을 놓는다는 의미로 당구장에서 많이 쓰는데, 그 의원님 당구 꽤나 치시나 봅니다 ^^ 야매, 나가리란 말도 많이 쓰는데, 들어본 적 있나요? “쌍거풀 수술 야매로 한 것 같다”“오늘 회식 나가리됐어”

나리카와= ???

현목= 찾아보니 야매는 ‘야미’(어둠, 암거래), 나가리는 ‘나가레루’(계획 따위가 중지되다)가 바뀐 거더군요.

나리카와= 오호 ^^ 영화 ‘친구’(2001, 곽경택 감독)의 명대사 “내가 니 시다바리가?”의 시다바리가 일본어에는 없어요. 한국에서 어쩌다 심부름꾼, 하인의 뜻이 됐는지…

현목= 영화 ‘베테랑’(2015, 류승완 감독)의 명대사에도 일본어가 나오잖아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나리카와= ‘카오’는 얼굴인데, ‘카오가타츠’하면 ‘체면이 서다’란 뜻이에요. 원래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네요.

현목= 뽀록나다(들통나다)도 많이 쓰는데, 짐작이 가나요?

나리카와= ‘보로가데루’(탄로나다)란 표현이 있는데, 거기서 온 것 같아요. 미묘하다, 야하다는 뜻의 야리꾸리하다는 말도 일본의 ‘야리쿠리’(부족한 것을 이리저리 궁리해서 변통하다)에서 온 것 같은데 의미가 전혀 달라요.

현목= 간지난다(멋지다, 스타일 좋다)도 일본에서 쓰나요?

나리카와= 느낌이란 뜻의 ‘칸지’에서 온 것 같은데, 일본에선 그런 식으로 쓰진 않아요.

역사의 아픔 서린 '무데뽀' '땡깡' '함바집'은 쓰지 말아야   

현목= 무모하다는 뜻의 무데뽀도 원래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아요. ‘무텟포(無鉄砲)’, 말 그대로 조총도 없이 강력한 적에 대항하는 거니 무모한 거잖아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눈에는 활로 버티는 조선군이 그렇게 보였겠죠.

나리카와= 땡깡 부리다는 말도 억지 부리다는 의미로 많이 쓰던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현목= 이 또한 역사의 아픔이 서려있어요. '텐칸'이 일본어로 '간질'이잖아요.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항의나 저항을 일본경찰과 관료가 '지랄병'으로 비하해 불렀는데, 그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라고 하네요.

나리카와= 함바집이란 말도 많이 쓰던데, 광산·공사장 인근에 가설한 (식당을 겸한) 인부 합숙소란 뜻의 일본어 '함바'에서 온 거죠?

현목= 네. 식당이름으로 쓰기도 하던데, 일제시대 강제징용자들의 한과 아픔이 서려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게 좋아요.

'세쿠하라' '스마호' '환미' 일본식 영어, 원어민 알아들을까? 

나리카와= 한국말에는 일본에서 온 잘못된 표현들이 많지만, 일본어는 이상한 외래어 때문에 위태로워지는 느낌이에요.

현목= 영어의 일본식 조어를 많이 아는 편인데, '코스파'의 뜻을 몰라 일본에서 당황한 적이 있어요. 우리 말로 가성비잖아요. '코스트 퍼포먼스'(cost performance)를 줄여 코스파라고 하다니 기상천외합니다. 'Sexual harassment'(성희롱) 'Power harassment'(갑질)도 줄여 '세쿠하라' '파와하라'가 됐는데, 이걸 영어권 사람들이 알아듣기나 할까요?

나리카와= 데지카메(디지털카메라), 파소콘(퍼스널컴퓨터), 카나비(카 내비게이션), 콘비니(컨비니언스 스토어·편의점), 스마호(스마트폰), 바이토(아르바이트), 스타멘(스타팅 멤버), 오후레코(오프더레코드), 파와포(파워포인트), 환미(팬미팅), 프레젠(프레젠테이션) 등등 끝이 없어요. 한국은 영어를 꼭 써야할 때만 쓰는데, 일본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일본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냐, 그것도 아니잖아요 ㅜㅜ

현목= 그렇다고 자학할 것 까지야 ^^ 마침 오늘 저녁 회식도 나가리됐고, 기분도 야리꾸리한데 쓰키다시 잇빠이 주는 이자카야나 갈까요? 여긴 내 나와바리니까, 분빠이 하지말고 내가 쏠게요.

나리카와= 헐…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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