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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 같은 영화로 위로받는 한국, 극한의 불만사회"

중앙일보

입력

일본 도쿄에서 1년간 연수한 중앙일보 대중문화팀 정현목 기자, 한국영화 전공의 나리카와 아야 칼럼니스트(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한일간 이슈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누는 '한남(韓男)일녀(日女)수다'. 어느덧 10번째가 됐습니다. 이번 토크의 주제는 1500만 관객을 모으며 대박 흥행한 영화 '극한직업'입니다. 형사들이 마약범을 잡기 위해 치킨집을 위장창업한다는 내용의 코미디 영화가 이렇게까지 터질 지 누가 알았을까요? 한국에서 1000만 영화가 갖는 의미와 그 이면의 문제점, 그리고 한일 양국 영화계의 현실 등에 대해 기탄없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극한직업' 이렇게까지 터져도 되나? 한국인 치킨사랑도 한 몫 

정현목(이하 현목)= ‘극한직업’ 재밌게 보셨나요?

나리카와 아야(이하 나리카와)= 재밌긴 했는데, 이 정도로 흥행할 줄은 몰랐어요. 남는 거 별로 없는 코미디 영화가 1000만 영화라니.

현목= 전 그렇게까지 재밌진 않았어요. 아는 평론가도 뒤늦게 영화를 보고 어떻게 이런 영화가 1500만 관객의 마음을 홀렸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하더군요.

나리카와= 너무 가벼워서 1000만 영화 반열에 올라도 되나 싶어요.

현목= 둔중한 메시지를 담아야 1000만 영화가 되는 시대는 지났죠. 순수 오락물로서 1000만 영화에 등극한 ‘도둑들’을 기점으로 말이죠. 1000만 영화의 ‘자격’을 따지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만듦새 외에 대진운도 있어야 하고, 개봉 시점 관객들의 심리와 공명해야 하는 부분도 있어야 하고.

나리카와= 그래도 ‘도둑들’은 반전도 있고, 볼거리도 화려했죠.

현목= 그래도 1500만 관객이 선택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 ‘세상 걱정 다 잊고 실컷 웃었다’ ‘신파 없는 깔끔한 코미디였다’는 반응도 꽤 있어요. 나리카와 상이 ‘극한직업’ 흥행에 대해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보니, 치킨에 대한 언급이 재밌던데요?

나리카와= 칼럼에 ‘치킨’이라 썼더니, 담당자가 치킨은 닭고기 아니냐 묻더군요. 그래서 한국인에게 치킨은 특별하다, 치맥 문화도 있고, 치킨을 (일본에서 유명한) 불고기보다 더 즐겨먹는다고 설명해줬죠. 치킨 아니었으면 영화가 흥행 못했을 걸요?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현목= 인정. 형사들이 된장찌개집 차렸다는 설정이면 그렇게 흥행했을까요? 한국인은 치킨사랑 유전자가 있는 듯 해요.

나리카와= 그리고 칼럼에 ‘감독은 이병헌인데 한류스타 이병헌은 아니다, 하지만 못지않게 잘생겼다, 경제가 어렵고 우울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람들이 맘껏 웃을 수 있는 영화를 원했다’는 내용을 담았죠.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로 울고 웃으며 위로받는 한국인들, 다들 마음 속에 '화' 지닌 듯  

현목= 정확히 6년 전 개봉한 ‘7번방의 선물’이 뜻밖에 1000만 영화가 됐을 때 ‘울고 싶은 관객의 뺨을 때려준 영화’라는 분석이 있었는데, ‘극한직업’은 반대로 ‘웃고 싶은 관객의 욕망에 제대로 소구한 영화’란 평가를 받았죠. 영화를 보며 다 함께 울거나 웃고 싶어하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다들 만성 우울증에라도 걸린 걸까요?

나리카와= 한국은 불만사회 같아요. 외국인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갖고 살아가요. 각자 마음 속에 ‘화’를 지니고 있다고 할까요? 그걸 어느 정도 영화로 해소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7번방의 선물'의 한 장면 [중앙포토]

현목= 경쟁이 치열한 초(超)스트레스 사회인 건 다들 인정하는 바죠.  ‘극한직업’에도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오잖아요. ‘네가 소상공인 잘 모르나본데 우린 다 목숨 걸고 해.’ ‘극한직업’보다 더 극한적인 상황에 몰린 자영업자의 현실을 이보다 더 절절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물론 영화는 ‘죽을 각오로 덤벼도 될까말까 한’ 자영업자들의 현실적인 고민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백종원 씨가 코치했다면 “지금 장난해유?” 했을 걸요.

나리카와= 그래서 전 치킨 파는 영화 이상으론 안봐요. ^^ 그렇게 소상공인 걱정하던 ‘극한직업’이 스크린을 싹쓸이해 작은 영화들이 더욱 소외된 건 모순 같아요.

홍상수 감독 영화도 밤 12시에… 스크린 독점에 몸살앓는 한국영화계 

현목= 극장이 특정영화에 지나치게 많은 스크린을 몰아주는 스크린 독점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네요.

나리카와= 예전에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보려고 극장에 갔는데, 낮 12시가 아닌 밤 12시 상영이었어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의 영화인데 이렇게 홀대해도 되나 싶더군요.

현목= 많이 걸어놓으니까 많이 보는 건지, 많이 볼만한 영화니까 많이 걸어놓는건지 스크린 독점 얘기를 하자면 끝도 없어요.

나리카와= 일본도 극장의 특정영화 쏠림이 있는데 한국만큼 심하지 않아요. 관객이 안 든다고 갑자기 관을 확 줄이는 경우도 없고요. 작년 일본 영화계에 의미있는 사건이 있었는데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란 영화의 흥행이었어요. 실험적인 저예산 영화여서 극장 두 군데서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스크린수가 엄청 늘었고, 지난해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영화가 됐죠. 제작비 300만엔(약 3000만원)으로 30억엔(약 300억원) 이상의 흥행수입을 냈으니까. 작은 영화라도 독창적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면 얼마든지 흥행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죠. 한국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일본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포스터

일본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포스터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한 장면 [중앙포토]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한 장면 [중앙포토]

현목= 2014년 480만 관객을 모은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이후엔 작은 영화의 의미있는 흥행이 없는 것 같아요. 1000만 영화들에서 도출한 흥행공식에 스타캐스팅과 대자본을 결합한 기획영화가 범람하고 있으니.

나리카와= 한국의 여러 영화제에서 본 좋은 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기회가 없어 아쉬워요.

현목= 영화의 다양성이란 게 제도적으로만 보장되는 건 아니에요. 의미있는 예술ㆍ독립영화를 극장에 걸어도 관객이 찾지 않으면 극장도 그런 영화를 내걸 명분이 없어지니까. 예매율ㆍ흥행 순위나 포털 평점ㆍ댓글을 기준으로 영화를 고르면서 독과점ㆍ다양성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물고 비판하는 사람들 많거든요. 그리고 일본영화계 상황이 우리보다 좋은 건 아니던데.

애니메이션이 점령하고, 사회성 외면하는 일본영화계, 활력 잃은 지 오래  

나리카와= 관객수 랭킹 상위를 보면 거의 애니메이션이나 외화에요. 일본 애니메이션 수준이 높긴 하지만, 실화 바탕의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는 흥행이 안되고 투자받기도 힘들어요. 예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거장들의 영화가 평가도 좋고 흥행도 잘 됐거든요.

현목= 몇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일본의 원로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사회성 있는 작품은 안만들고, 죄다 고양이 영화만 만든다”며 일본영화계를 비판했어요.

나리카와= 또 다른 문제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영화는 제작위원회가 만드는데 거기서 방송국의 힘이 세요. 그래서 TV 방영을 전제로 작품을 만들죠. ‘춤추는 대수사선’시리즈가 그런 예인데, TV 드라마를 조금 키워서 극장에서 본다는 느낌입니다. 그나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가 해외에서도 평가받고 국내 흥행도 잘 되는 편이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와는 비교도 안되게 관객수가 적어요.

현목= 최근 수년간 본 일본영화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작품이 ‘분노’였는데, 재일동포 이상일 감독이 만들었더군요.

나리카와= 일본영화가 워낙 활력이 없다보니, ‘택시 운전사’ 같은 한국영화를 보고 놀라는 영화팬들이 많아요.

일본영화 '분노'의 포스터

일본영화 '분노'의 포스터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중앙포토]

현목= 일본에 있을 때 일본인 지인이 ‘택시 운전사’를 보고 감동받았다며 제게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어요. 다시 한국 얘기로 돌아오면, 한국사람들은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어요. 영화 선택 뿐 아니라 소비 성향도 그래요. 남들이 많이 사는 걸 사야 하고, 남들이 많이 가는 데는 꼭 가봐야 하고, 그렇게 소비의 동질성을 확보해야 안심이 되는지….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두렵게 생각하나 봐요.

영화 뿐 아니라 소비도 쏠림 심한 한국…일본 관광객, 검은 롱패딩 붐에 놀라  

나리카와= 패션도 그래요. 예전에 한국서 유학할 때 대학생들이 이스트*, *스포츠 등 똑같은 백팩을 매고 다니는 게 신기했어요. 일본은 그러지 않거든요.

현목= 요즘 중고생들 겨울 외투 보면 죄다 검은 색 롱패딩이에요. 교복인 줄 알았어요.

나리카와= 일본에서 지인들이 자주 놀러오는데, 검은 색 롱패딩 붐을 보고 되게 신기해해요. 닭요리만 해도 닭갈비, 찜닭, 불닭 이런 식으로 한쪽으로 쏠리고 유행도 자주 바뀌잖아요. 일본은 가게가 그렇게 자주 바뀌지 않아요.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검은 색 롱패딩.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검은 색 롱패딩을 입은 청소년들이 거리를 걷고 있다. [뉴스1]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검은 색 롱패딩.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검은 색 롱패딩을 입은 청소년들이 거리를 걷고 있다. [뉴스1]

현목= 뭐가 ‘대세’다 라는 말도 굉장히 한국적인 표현이에요. 다양성을 억압하고 모든 걸 획일화하는 부정적 의미가 더 크다고 봐요. 주변에 ‘1000만 영화는 안본다’는 신념을 가진 영화팬들도 있어요.

나리카와=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도, 영화팬 입장에서 해마다 2억명 이상이 극장을 찾고, 한해 세편 꼴로 1000만 영화가 탄생하는 한국이 부러워요. 일본사람들은 지금 무슨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는지 별로 관심 없거든요. 영화관람료(1800엔)가 비싼 탓도 있지만, 주로 DVD를 빌려 집에서 봐요.

현목= 영화 한편에 인구의 20~30%가 몰리는 현상을 좋게만 볼 순 없어요. 멀티플렉스와 결합한 복합쇼핑몰이 입지 좋은 곳마다 자리 잡고서 문화향유의 대안이 없는 사람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한해 평균 네 편 이상 보면서도 책 한 권 읽지 않고, 공연장 문턱을 한 번도 넘지 않은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일본에서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동네 곳곳의 도서관과 커뮤니티 센터, 공원들이었어요. 그런 문화 인프라가 갖춰져야 다양한 취미와 라이프스타일을 즐길 수 있잖아요. 안그래도 성냥갑 같은 똑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이 복합쇼핑몰에서 ‘대세’ 영화를 보는 식의 획일적인 문화 소비를 하다 보면 나중엔 생각이나 가치관도 비슷해지지 않을까요?

나리카와= 그런 의미에서 제가 다양성 영화 초대권을 받았는데, 같이 보러 가실래요?

현목= 그 영화, *이버 평점과 댓글 뒤져보니 ‘핵노잼’이라던데.

나리카와= 기자님… ㅠㅠ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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