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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풀고 나왔다"···성폭행 여성 절규에 침묵하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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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서 1년간 연수한 중앙일보 대중문화팀 정현목 기자, 한국영화 전공의 나리카와 아야 칼럼니스트(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한일간 이슈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누는 '한남(韓男)일녀(日女)수다'. 9번째 토크의 주제는 한일 양국에서 공감받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입니다. 82년생 여성이 한국사회에서 겪는 성차별 등 부조리한 현실을 그린 베스트셀러가 일본에서 발매 한달 만에 5만부가 팔리는 등 큰 화제가 됐습니다. 소설의 어떤 점이 양국 여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은 것일까요? 그 답은 남성중심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는 양국의 현실에서 찾아야겠죠.


정현목(이하 현목)= 소설을 어떻게 봤나요? 82년생으로서.

나리카와 아야(이하 나리카와)= 재밌었어요. 공감가는 부분도 있고. 특히 재밌다고 느낀 게 김지영이 상담받는 정신과 의사가 공감능력과 이해심 있는 남성인 줄 알았는데, 여성차별적 발언하며 끝나잖아요.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허무함?

현목= 다 그렇진 않은데...

나리카와= 알아요. 기자님은 안 그렇다는 거^^ 남편도 배려있는 편인데, 명절 준비를 내게 모두 맡길 땐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 남성 대부분이 그렇지만.

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소설 '82년생 김지영' [사진 민음사]

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소설 '82년생 김지영' [사진 민음사]

일본서 한달 만에 5만부 팔려, 중년 여성들 "우리 세대 얘기" 공감  

현목= (뜨끔) 그건 그렇고, 소설이 일본에서 발매 한달 만에 5만부 팔렸다던데, 일본 독자들이 어떤 부분에 공감했을까요?

나리카와= 40대 이상 여성이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저는 남녀평등을 전제로 살아왔던 세대라, 소설을 읽으며 한국은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저보다 열살 많은 일본인 여성이 소설을 읽고서 ‘내 세대의 얘기’라고 하더군요.

현목= 한국에서도 소설의 취지엔 공감하지만, 묘사된 차별이 82년생이 아닌, 이전 세대가 겪었을 법한 거란 지적이 있어요.

 '82년생 김지영'의 일본판

'82년생 김지영'의 일본판

일본 오사카의 한 서점에 진열돼 있는 '82년생 김지영' 일본판 [사진 나리카와 아야]

일본 오사카의 한 서점에 진열돼 있는 '82년생 김지영' 일본판 [사진 나리카와 아야]

나리카와= 출산·육아 관련 불만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거에요. 애를 둘 낳은 아사히 신문 선배가 소설을 읽었다며 이메일을 보내왔는데, ‘그래서 당신(남편)이 잃은 게 뭐냐’는 김지영의 대사가 와닿았대요. 결혼한 지 9년 된 자기도 똑같은 말을 남편에게 수십번 했대요. 워킹맘의 스트레스는 엄청난데 남편은 달라진 게 없다, 애 낳고서 여자만 손해봤다고 느끼는 거죠. 애 둘 낳으면 남편이 싫어진대요 ^^ 육아에 전념하다가 일자리를 못구하는 ‘경단(경력단절)녀’가 주위에 많은데, 그런 상황에 처할 때도 남편이 원망스럽다고 하네요.

현목= 요즘은 남자들이 육아휴직도 내고 바뀌어가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자들이 더 큰 짐을 지고 있는 건 인정합니다. 그리고 입학·입사 때 보이지 않는 남녀 차별이 존재하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고요. 한국에선 최근 주요 은행·증권사가 여자지원자의 점수를 깎거나 남자지원자의 점수를 올리는 차별채용을 한 사실이 드러났고, 일본에선 지난해 도쿄의대 등 많은 의과대학이 여자수험생의 점수를 깎는 등 조직적 차별정황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잖아요. 또 소설의 어떤 부분에 공감했나요?

나리카와= 성희롱 피해자 입장에서 그 부분에 화가 났어요. 불쾌하지만 일일이 따지는 게 피곤해서, 또는 손해볼 것 같아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도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착각하는 남자들 보면 화가 나요.

현목=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요?

나리카와= 신문기자 시절 판매국 간부가 회식에서 저와 둘만 남는 상황을 만들고 강제로 손잡고 포옹하려 했어요.  그 간부와 일하는 친구가 불이익 당할까 두려워 문제 삼진 않았죠. 그 점을 이용하는 것 같아 더욱 화가 났어요.

현목= 한국도 성희롱 문제가 심각했지만 많이 개선되고 있어요.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사내고발 시스템을 갖춘 회사들도 많아요. 교육을 받은 뒤 여자후배에게 카톡 보낼 때나, 대화 할 때 이모티콘이나 단어 사용에 더욱 신중해지더라고요.

나리카와= 술자리에서 여대생의 특정 부위를 만졌다는 이유로 ‘미투’ 고발당해 일을 그만둔 사람 얘기를 듣고, 한국에선 그 정도 일로 직업을 잃는구나 생각했어요. 난 그런 일 진짜 많이 당했는데…. 취재원이었던 문화예술인이 술자리에서 제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만졌던 적도 있어요.

현목= 한국에서 그랬다간 당장 기사가 나고,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죠. 몇년 전 영화기자를 할 때, 술자리에서 스타배우가 안주로 나온 오징어를 찢으며 ‘오징어는 여자가 찢어줘야 맛인데’라고 하길래 ‘말조심 하라’고 타일렀던 적이 있어요.

일본 경찰간부, 여기자에 "고생말고 시집이나 가라" 충고하기도

나리카와= 성희롱 때문에 입사 한두 해 만에 회사를 그만둔 신문사 동기가 둘이나 되요. 한 친구는 미국 대학을 졸업했는데, 일본 신문사가 너무 전근대적이란 말을 많이 했어요. 취재를 위해 밤낮으로 따라붙는 여기자에게 ‘여자가 이런 거 하지 말고 결혼해서 편하게 살아라’고 한 경찰간부도 있었어요.

현목= 한국에서 경찰 간부가 그런 말 하면 사과하지 않고선 못 버틸 거에요. 일본에선 왜 미투 운동이 활발하지 않은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리카와= 몇명이 고발하긴 했지만, 한국처럼 뜨겁게 불 붙진 않았어요. 기대했던 결과가 안나오고, 오히려 피해자가 비난받는 상황이 되니까 피해자가 해외로 이주한 경우도 생겼고.

2017년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공개하며 미투 운동을 시작한 이토 시오리. [AP=연합뉴스]

2017년 자신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공개하며 미투 운동을 시작한 이토 시오리. [AP=연합뉴스]

현목= 이토 시오리를 말하는 거죠? 방송국 간부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폭로했지만, '밀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수사를 않는 사법당국의 미온적인 태도, 그리고 일각의 비난과 협박 때문에 영국으로 이주해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나리카와= 맞아요. 용기있는 피해자가 나오면 지켜주겠다거나, 응원하겠다는 반응이 많아야 하는데, 비난이 더 많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더 움츠려들죠.

방송사 간부에 성폭행당한 이토 시오리의 절규에 침묵한 일본 사회  

현목= ‘평소 행실이 어땠길래’ ‘꽃뱀 아니냐’ ‘다른 목적이 있겠지’ 등의 비난이죠? 한국과 다르지 않네요. 이토 시오리의 폭로 기자회견 때 일부 매체가 ‘셔츠 단추를 풀고 나왔다’고 보도하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어요. 이토 시오리는 '좌익이다' '재일 한국인이다'는 음해에 시달리기도 했고요. 그를 성폭행한 방송국 간부는 아베 총리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고, 퇴사 후 아베 내각을 다룬 『총리』란 책을 쓴 뒤 방송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 이토 시오리가 쓴 책 '블랙박스' 표지

성폭력 피해자 이토 시오리가 쓴 책 '블랙박스' 표지

나리카와= 일본인들은 ‘메다츠’(目立つ, 눈에 띄다)한 사람을 싫어하고, 스스로도 ‘튀지’ 않으려 노력해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 ‘(집단에서) 너무 튀면 안된다’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그런 의식이 몸에 뱄어요. 일본 여검사가 한국의 서지현 검사처럼 용기 내서 상사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해도, 한국처럼 파장이 커지지 않았을 거에요. ‘그렇게까지 해서 조직에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이 쇄도하면서 흐지부지됐을 테니까.

상사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폭로,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 [중앙포토]

상사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폭로,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 [중앙포토]

현목= 일본말에도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표현이 있더라고요.  ‘데루쿠이와우타레루’(出る杭は打たれる, 튀어나온 말뚝은 얻어맞는다)

'모난 돌' 되기 싫어 부당한 일 당해도 감내하는 일본인들  

나리카와= ‘KY’란 말도 있어요. ‘쿠키오요메나이히토’(空気を読めない人,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의 약칭인데, 일본인 대부분은 남 눈치 안보고 할 말 다하는 KY에 비판적이죠. 저도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이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참았던 게 되게 많아요. 미국에서 공부한 이토 시오리가 만약 일본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런 용기를 내기 힘들었을 거에요.

현목= 말 안하고 있으면 피해자가 계속 나오잖아요. 성폭력은 더 기승 부리고.

나리카와= 그래서 답답해요. 더 억울한 건,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여성을 비난하는 건 대부분 남성인데, 일본은 ‘네 행실이 어땠길래’라며 여성들도 비난에 가세해요. 그래서 피해여성이 더 상처받아요.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KY가 될까봐 숨 죽이고 살던 분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공감하고 위로받는 면도 있을 거에요.

현목= 작가는 양성평등사회를 꿈꾸며 소설을 썼을텐데 남녀 별로 반응이 엇갈리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나리카와= 한국은 남녀갈등이 너무 심해요. 여자들이 마스크 쓰고 몰카(불법촬영) 반대 시위하는데, 그걸 찍는 남자들이 있고, 여자들이 막으려 또 싸우고….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페미충' '한남충' 남녀 갈등 극심한 한국사회, 대체 왜 이러나   

현목= 시위 여성들 사진 찍어 ‘예쁜 여자들은 이런 데 절대 안나온다’며 조롱하는 남자들이 있기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죠.

나리카와= 일본도 그래요. 일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비판할 때 ‘모테나이카라’(인기가 없으니까) 저러고 있는 거다 라고 손가락질 하거든요. 한국에서 ‘페미충’ ‘맘충’ 같은 극단적인 비하 표현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소설에서 김지영은 ‘맘충’이란 말을 듣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잖아요. ‘한남충’이란 말도 있던데요.

현목= 멀리서 찾을 필요 없어요. 제가 바로 ‘한남’이니까 ^^ 우리 대담의 제목을 정할 때 ‘한남일녀 수다’로 한다니까 엄청 웃는 사람도 있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한국 남자란 단어가 왜 조롱거리가 됐는지 안타깝네요. 양성평등사회를 위해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당연하지만, 모든 문제를 여성혐오나 젠더 문제로 환원하는 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영화 '82년생 김지영' 주연을 맡은 배우 정유미 [사진 매니지먼트 숲]

영화 '82년생 김지영' 주연을 맡은 배우 정유미 [사진 매니지먼트 숲]

나리카와=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레드벨벳 아이린과 영화에서 김지영 역을 맡은 배우 정유미에게 악성댓글을 다는 남자들도 문제죠. 입장 바꿔 생각하며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기자생활 할 때 당일치기 도쿄 출장을 다녀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칸센 막차의 승객 대부분이 피곤에 쩔어있는 남자 샐러리맨들이에요. 밖에서 저렇게 힘들게 일하고도 집에 가면 애 안봐준다, 살림 안도와준다는 잔소리를 듣겠지 란 생각에 남자들이 불쌍해지더군요.

현목= 집에서 애 보느니, 차라리 밖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하는 남자들이 많아요. 그만큼 육아가 힘든 일이라는 거죠. 주52시간 근무로 여유시간이 늘어난만큼 가사와 육아를 함께 하는 남자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얘기가 드라마 ‘SKY캐슬’처럼 너무나 훈훈한 결말로 끝나는 느낌 ^^

나리카와= 그건 그렇고, 문제의 오징어 발언을 한 스타배우는 누군가요?

현목= 생맥주 한 잔 할 때 알려드릴게요. 물론 오징어는 제가 찢겠습니다 ^^ 그리고 자신이 겪은 성희롱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용기 내주셔서 감사해요.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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