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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숙제는 하셨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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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얼마 전 해외토픽에서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직접 펜으로 글씨를 쓰는 로봇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렴한 프린터로 글자 뿐 아니라 그림도 자유자재로 인쇄할 수 있는 세상에 필사하는 로봇이 왜 필요한가 했더니 중국 학생들의 숙제용으로 불티나듯 팔렸다는 이야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공부한 것을 자신의 필체로 가득 채워 백지를 메우는 숙제가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죠.

방학이 끝나가는 무렵 밀린 일기를 쓰기 위해 잔뜩 쌓여있는 신문더미에서 일기예보가 들어있는 면을 열심히 뒤적거리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여름방학보다 겨울방학 숙제엔 더 꾀를 부렸습니다. 학년이 바뀌어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 수 있기에 방학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하자면 레임덕 현상이라 불러야 할까요? 이 필기 로봇을 사용하면 숙제를 학생의 필체로 직접 종이에 수십장이고 적어준다 합니다. 반드시 손으로 써 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첨단 기술과 학부모의 재력이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어릴 적 중학교에 입학 후 담임선생님이 반의 모든 친구들에게 내주신 숙제는 하루 4장의 종이를 무엇인가로 빽빽하게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단어건 한자건 관계없이 손으로 채워나가며 배우라는 엄명이었는데 늘 들고 다니시던 지시봉으로 맞기 싫다면 검사 전 주말은 넓디 넓은 빈칸을 메우기 위해 반납해야만 했습니다. 벌써 수십년 전의 기억이 지금 중국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니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는 종이 아닌 듯 합니다.

숙제는 하셨습니까?

저는 지난 주말 가족들과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이 역시 아이의 건강과 사회성을 키워주려는 저와 가족의 숙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꾸준히 서점에서 신간을 살펴보는 것도 새로운 세상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숙제이고, 한 가지 일을 올곧게 오래하는 것도 내 인생의 자산을 축적하고 노후를 준비하기 위한 숙제입니다.

지금과 어릴 적 숙제의 차이는 알림장에 할일을 적도록 하던 선생님이 아니라 이제 스스로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삶의 선생님이 되어야 하기에 옛 선비처럼 스스로에게 나름의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은 그때의 선비 또한 본인이 흔들릴 것을 저어하여 스스로를 두 개의 자아로 분리하고 자신에게 엄격해지는 삶의 규율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는지요.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