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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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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호 31면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 정도면 민폐다. 근 3년을 끌어 온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를 둘러싼 혼란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과연 영국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그대로 추진할지, 미룰지, 국민투표를 다시 할지 지금 오리무중이다. 영국 의회는 다음 주 화·수·목 3일 간 세 번의 투표를 연이어 한다. 앞으로의 향방은 그 이후에나 가늠할 수 있다.

브렉시트로 전세계 대혼란 #사전준비, 분석 미흡이 원인 #여러 이슈 실타래처럼 얽혀 #섣부른 결정 탓 어려운 영국 #오랜 협정·체제 변화는 신중하게 #다양한 파장 철저히 살펴보아야

브렉시트 날짜는 3월 29일, 불과 20일 후다. 그런데 아직 영국의 진로가 미확정이니 전 세계 여러 국가, 기업, 개인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우리도 곤혹스럽다. 당장 한-EU FTA에서 영국이 떨어져 나오니 공백을 메울 한영 FTA를 새로 체결해야 한다. 3월 29일 브렉시트가 발효한다 치면 그 날짜까지 새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이미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런 저런 피해가 불가피하다.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처지다.

혼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탈퇴 과정을 힘들게 해 앞으로 추가 이탈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하겠다는 EU의 강경책도 한몫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영국의 준비 부족이다. 브렉시트의 파장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 티가 곳곳에서 보인다. 속 시원한 결정은 했지만 항목별 명세표를 보고 서서히 고민에 빠졌다. 역시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결정 때만 해도 원래 계획은 영국과 EU가 서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깔끔한 이별이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곧 깨닫는다. 근 45년간 뼈와 근육과 신경망을 연결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다 이제 떼어내려니 쉽다면 이상하다. 여러 영역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줄줄이 고개를 든다. 특히 모든 국가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영토’ 문제를 다시 불러 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스페인 끝자락의 지브롤터, 그 중 하나다. 1713년 유트레히트(Utrecht) 조약으로 스페인 내 영국령이 된다. 32,000명 주민이 거주하는 이 지역에 대한 영-스페인 영유권 분쟁은 그간 잠잠했었다. EU 체제 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EU 역내다. 국경없이 매일 양쪽에서 서로 왕래한다. 이제 영국이 떨어져 나가면 국경은 다시 찾아온다. 앞으로의 자리매김이 애매하다. 이미 스페인은 지브롤터 문제를 다시 꺼내고 있다.

지중해 반대편의 섬나라 키프로스. 역시 EU 회원국이다. 여기에도 두 군데 영국령이 있다. 영국의 EU 탈퇴는 15,000명 주민이 사는 이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초래한다.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EU 회원국 아일랜드 간 경계도 그렇다. 새로 국경선이 들어오면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겨우 봉합된 영국과 아일랜드간 해묵은 갈등이 다시 수면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크다.

올 2월 25일 영국은 중요한 외교적 패배에 직면한다. 헤이그 소재 국제사법재판소(ICJ)는 1965년 영국령으로 편입된 인도양 차고스 제도(Chagos Archipelago)를 모리셔스에 반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017년 6월 유엔 총회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한 결과다. 결정 내용은 차치하고, 그 절차로 넘어간 건 총회 표결에서 독일, 프랑스를 위시한 EU 국가들이 영국에 등을 돌린 게 주요 동인이다. 브렉시트 시대 EU의 싸늘한 반응이 인도양에도 미쳤다.

모두 브렉시트의 예상치 못한 행로다. 브뤼셀의 간섭을 피하고 정책의 독자성을 확보하려 시작한 작업이 어찌하다 오히려 민감한 영토 문제를 여기 저기 건드리고 있다. 브렉시트 드라마가 어떻게 결말이 나건 앞으로 영국에는 큰 부담이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다. 영토문제는 단지 한 사례에 불과하다. 여러 영역에서 비슷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영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다.

확 떼어내지 못하겠으니 어정쩡한 대안들이 나온다. EU 회원국은 아니지만 관세동맹으로 남겠다는 방안도 그 중 하나. 헤어지지만 삶의 동반자가 되자는 이야기다. 혜택은 누리고 부담은 피하는 거래를 EU가 용인할 리 만무하다. 온갖 방안을 짜내다 보니 스텝은 꼬이고, 혼란은 이어진다.

3년간의 브렉시트 과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오랜 기간 국제사회에서 제도화와 화학적 융화가 일어난 영역을 일거에 떼어내거나 대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기존 협정과 체제를 바꾸는 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러 예상치 못한 숙제를 수반한다. 면밀한 사전검토로 모든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 철저한 시뮬레이션만이 살 길이다. 브렉시트에서 보듯 경제·외교·국방·교역 모든 이슈가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있다. 하나를 당기면 줄줄이다.

어려운 일이다. 외교 대국 영국이 고생한다면 말 다했다. 사방의 강대국과 경제·안보 측면에서 이러 저리 얽혀 있는 우리는 말할 나위 없다. 방향이 옳다는 것만 보고 덥석 나아가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먼저 악마를 잡자. 디테일을 확인하자.

영국은 몇 번 실수해도 된다.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다. 동서남북 절벽이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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