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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여행 때 만난 과거 꼬마 환자였던 아이 엄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승준의 이(齒)상한 이야기(3)

아이들에게 치과가 무서운 곳이 아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의심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치과에 첫 방문은 언제가 좋을까? 젖니는 썩어도 괜찮은 걸까? 때론 소란스럽고 역동적인 소아치과의 세계로 안내한다. <편집자>

호주 바이런 베이 가는 길 한 소도시에 있는 치과를 방문했다. [사진 전승준]

호주 바이런 베이 가는 길 한 소도시에 있는 치과를 방문했다. [사진 전승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련 기간을 마친 후에 진료를 시작한 지가 벌써 23년이 돼 갑니다. 아기자기하게 아이들을 위한 인테리어를 해놓고 첫 환자를 기다리던 그 순간이 아직도 선한데 그동안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아이의 숫자가 수만 명은 됩니다.

그 짧지 않은 기간에 나를 찾아와준 아이들. 처음 왔을 때부터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시종 즐거워하던 아이가 있는가 하면 병원 입구부터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기를 거부하던 아이도 있고 다쳐서 피를 흘리며 부모의 눈물과 함께 처음 대면했던 아이도 많았습니다. 그 다양한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웃고 이야기하고 부대끼면서 함께 온 부모들과도 나눈 세월은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소아치과 의사로 많은 아이를 만나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게 되지만 치과에 오는 것을 무서워하면서 부모 손을 뿌리치는 아이를 달래고 얼러 결국에 치과를 좋아하도록 만들었을 때의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치는 아이도 몸을 묶거나 약을 사용해 치료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와 천천히 교감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 서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과정은 정말로 소아치과 의사로 살아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그중에서 꼬마 아가씨 환자 아이였다가 지금은 아이 엄마가 된 몇몇이 있습니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검진 및 치료를 받으면서(보호자들의 정성이 대단합니다) 처음에 치과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고 어떤 곳보다도 친근하고 가고 싶은 곳이 된 분들이죠.

옛날 꼬마 환자 아이가 한 아들의 엄마가 되어서 호주 브리즈번에 살고 있다. 이번에 아내와 함께 방문해 바이런 베이 하얀 등대(옛날에 포카리 스웨트 광고에 나왔던^^) 앞에서 촬영했다. 맨 왼쪽이 아이 엄마, 아내, 아이, 그리고 나다. [사진 전승준]

옛날 꼬마 환자 아이가 한 아들의 엄마가 되어서 호주 브리즈번에 살고 있다. 이번에 아내와 함께 방문해 바이런 베이 하얀 등대(옛날에 포카리 스웨트 광고에 나왔던^^) 앞에서 촬영했다. 맨 왼쪽이 아이 엄마, 아내, 아이, 그리고 나다. [사진 전승준]

성인이 된 후에도 어릴 때부터 진료받아온 선생님을 찾고 싶고 결혼 후에 남편을 데리고 오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까지 꼭 봐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전부터 형성된 상호 신뢰 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즈음 인터넷에서 ‘치과의사 폭행사건’, ‘치과의사 블랙리스트’등 연일 치과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와 글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치과가 이슈화하고 있는 것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의료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의료인의 말이 무조건 옳은 줄 알았다가 여러 가지 정보를 듣고 주고받으면서 색안경을 끼고 치과를 바라본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 치과의사는 모두 첫 진료를 시작할 때 그 떨리던 심정을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소설책에서나 영화에서처럼 사랑의 인술을 펼치겠노라는 선량하고 멋진 초심을 지켜나가리란 다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료 행위가 일상이 돼 버리고 또 환자와 마찰을 수없이 경험하다 보니 방어적이고 필요한 말만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와의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은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소아치과 의사로 보람 느끼게 해준 호주 여행

과거 꼬마 환자였다가 지금은 호주에 이민 간 아이 엄마를 최근에 만나 너무도 기뻤습니다. 호주 치과의사와 교류를 위해 시드니를 방문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 엄마는 시드니 인근의 브리즈번에 있는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초대한 것이지요.

반갑게 만나 이틀 동안 밀착 안내를 받으며 호주 생활 이야기와 볼거리를 즐기는 등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왔습니다. 아직도 귀여운 아들과 함께 갔던 바이런 베이의 시원한 바람과 파도 그리고 남편분과 밤늦게까지 하늘의 별을 보면서 나누던 세상 사는 이야기가 귓전에 선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를 다시 한국의 진료실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반갑게요~

호주에서 만났던 가족을 한국에 와서 다시 만났다. 병원에서 촬영한 사진.[사진 전승준]

호주에서 만났던 가족을 한국에 와서 다시 만났다. 병원에서 촬영한 사진.[사진 전승준]

진료실에서 벗어날 기회가 됐던 이번 여행에서 잠시 나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치과의사로 첫발을내디뎠을 때와 지금은 나 자신이 분명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매너리즘이랄까. 시간에 너무 쫓기다 보니 생각할 시간도 또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매일 병원에 출근해 진료하는 삶이 싫지는 않고 나름 보람과 재미를 느끼고는 있지만 ‘과연 나는 초심을 지키고 있는가’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졸업식 때 손을 들고 패기 있게 외쳤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어버리고 슬그머니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환자를 어떻게 대하면 그 사람의 불편감과 아픔을 어루만져 줄 것인가 밤잠을 설쳐가면서 고민했던 그 순수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찾아오는 환자와 마음의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 호주여행이 가르쳐줬습니다.

다시 선택한다 해도 소아치과 의사의 길

내가 삶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여러 직업적인 갈림길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겠지만 결국은 치과의사의 길을 걸을 것 같습니다. 치과의사의 길 중에서도 지금처럼 맑디맑은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이 축복의 소아치과의 진료시간을 계속 누리고 싶습니다.

내가 치료해준 아이가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가지고 오고 또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오는 등 여러 세대가 한 곳에서 진료를 받는 그런 치과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치과의사를 꿈꾸며 치과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멋진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승준 분당예치과병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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