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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노동자와 순교자 사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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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이 한창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한 지방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낭독된 졸업생 대표의 답사가 일본 전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제의 부분을 옮겨보자.
『…진학과 취직을 목전에 둔 저희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지난 1년동안 일교조파업으로 교과진도가 반정도밖에 못나간 과목이 있었습니다. … 수업중 모어녹이 담긴 인쇄물을 배부해주시고 천황은 나쁜놈, 일장기는 싫다 등을 예사로 말씀하시던 「가가와」선생님, 자본주의에 대한 강의는 1시간밖에 안하시고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4시간씩이나 정성을 들여 가르쳤습니다.
「쓰노」선생님, 선생이란 성직이 아닌 노동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왜 학생들을 구타했습니까. 생산자와 제품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학생을 구타할 이유가 없지않습니까…. 「고다」선생님, 문화축제때 학생이 잘못해서 기미가요를 방송으로 내보냈을 때, 왜 그런 곡을 내보냈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기미가요나 일장기가 왜 나쁘다는 것입니까…. 74년3일1일 후쿠오카현립고등학교 제24회 졸업생 대표』
이 졸업식 답사는 졸업생 간부10여명의 토론끝에 합작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사은의 정으로 넘쳐나야 할 졸업식장에서 이토록 공개적으로 스승을 매도하고 비난하게 되기까지 교원노조를 둘러싼 일본교육계의 진통이 얼마만큼 극심했던가를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사건이었다.
아울러 국가와 국기마저 혐오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성향으로 치달았던 당시 일교조교사들의 의식동향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물증이 되기도 한다. 이 답사사건이후 일교조 주도의 교육풍토에 대한 매도와 국기·국가마저 이단시하는 교사들에게 자녀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학부형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일교조=일본교육황폐화라는 등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교조 40여년의 역사속에서 생겨난 이러한 혼란과 갈등이 전교조결성 20여일의 나날속에서 우리의 학교, 우리의 교실에서도 그 휘후의 편린들이 부분적이나마 번득이고 있음에 가슴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6·25전쟁은 미국주도에 의한 북침이었다는 주장을 교단에서 펼친 지방의 한 교사는 교장의 고발로 경찰에 구속됐다.
수업을 받은 학생 2명이 고발된 교사의 참고인으로 출두해 선생의 유죄를 입증할 수밖에 없게되고 참고인으로 나간 두학생은 속절없는 죄의식으로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전교조 지회·분회가 결성될때마다 학부형이 몰려와 교무실을 점거하고 교사들은 게릴라처럼 히트앤드런 작전을 펼치며 쫓고 쫓기는 학부형과 교사간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지고 끝내 전치몇주의 진단서가 오간다.
분회결성 자축연을 끝낸 여교사가 떡접시를 교장앞에 내밀자 격앙된 감정을 이기지못한 교장선생님이 실신해버린다. 『왜 이순신장군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학생들한테 가르쳤느냐』고 따지는 학부형이 담당교사를 잡고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온갖 우여곡절속에 40여년 역사를 지켜온 일교조와 이제 갓 법외노조로 결성을 끝낸 전교조를 병렬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학부형이 우려하고 여론이 두려워하는 바는 지난 20여일의 교원노조 결성 운동과정속에서 이미 일교조에서 보았던 부정적 측면이 작게나마 드러나고 있기때문이다.
특히 노동자로서의 교사처우개선과 교육권행사의 주체로서 참교육을 실천하겠다는 순교자적 교육목표를 전교조가 동시에 내걸고 있기 때문에 학부형과 사회는 우려와 개탄을 동시에 쏟는 것이다. 교육노동자로서의 권익옹호와 참교육의 실천자로서의 교육독점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전교조에 대한 저항감도 상대적으로 높아져 가는 것이다.
20년근속 교사 30호의 일보수가 58만9천원, 영하 10도의 추위에서도 조개탄 난로마저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는 열악한 우리의 교육환경은 마땅히 개선되어야 한다.
이미 대통령도 교육투자의 확대를 약속했고 정부·여당이 교사의 신분과 지위를 향상시킬 교원법을 서둘러 추진하고 있다. 처우개선과 교육환경개선은 국민적 합의에 따라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교육권 행사의 주체자로서 교사들이 주장하는 참교육의 실현투쟁은 어떻게 될것인가. 교무회의를 의결기구로 하고 교사집단의 의사에 따라 교육목표. 교육행정을 의결·운영하고 교과과정과 교과서를 교사들의 자유선택에 맡겨야한다는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그럴리가 없겠지만, 만약에 하나라도 자본주의는 1시간 가르치고 공산주의는 4시간 가르치는 일교조의 선례가 우리의 교실에서 발생하게 되고, 더 나아가 남족체제는 타파의 대상이고 북의 현실은 주체사상으로 뭉쳐진 통일의 주체라고 인식하는 운동권 대학생의 논리가 그대로 중·고등 교육현장에까지 확산될 때, 그것을 참교육의 실현이라고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초·중등 교육이란 공교육이고 그 교육의 주체는 국가와 교사·학부형이 함께 분담해야할 공적 기능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스스로 노동자이기를 바라면서 참교육실현의 순교자가 되기를 고집하는 논리가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전교조가 일교조의 실패한 논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나마 어렵게 이룩된 국민적 공감대, 처우개선과 교육환경의 개선을 추진하기위해서도 전교조의 집단행동은 더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처우개선을 위해서는 스스로 노동자임을 내세우고 교육권의 독점을 위해서는 참교육의 순교자임을 앞세우는 양면의 논리를 더 이상 펴지말자. 노동자와 순교자라는 전혀 다른 두 얼굴을 동시에 내세우지말자. 우리의 교사들은 그냥 우리의 존경받는 선생님이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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