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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영화] ‘극한직업’의 자영업 판타지가 헛헛한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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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호 31면

박우성 영화평론가

박우성 영화평론가

또 한 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다. ‘극한직업’(이병헌 감독)이 천만을 넘어 천오백만 관객을 동원할 기세다. 대개의 천만 영화는 공분과 신파를 공유한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을 설득하지 못하면 천만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하다. 이때 유용한 것은 복잡한 수요를 초월하는 근원적 공통감각에 기대는 것, 즉 화나게 하고 울게 만드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못 다르다. ‘극한직업’은 코미디 영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런 것 없이 오직 웃음 하나만으로 한국영화가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내고 있다.

그런데 ‘극한직업’에는 코미디 장르로서 진일보한 지점이 딱히 없다. 마약 단속반과 거대 범죄조직의 대결은 많이 본 구도다. 캐릭터 역시 코미디 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뻔한 대결 구도 안에서 과장된 표정을 짓고, 과도한 말을 쏟으며, 익살스러운 몸짓을 전시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연출가의 개성이 힘을 발휘했는지 모른다. 이병헌 감독은 별것 아닌 장면을 희극적으로 극대화하는 방법을 아는 연출가다. 무엇보다 말장난에 발군이다. 우리는 ‘스물’에서 사소한 다툼이 과장된 장면 구성, 엇갈리는 편집 리듬, 기발한 배경 음악을 통해 웃음의 시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사례를 알고 있다. ‘바람 바람 바람’에서 의뭉스러운 말맛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장면 극대화와 언어유희야말로 코미디 영화의 대표적 문법이다.

영화 ‘극한직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극한직업’.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이런 점에서 ‘극한직업’의 흥행은 보다 정확하게 기술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그것은 웃음 하나로 한국영화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는 상황이 아니다. 이때의 웃음은 전형적인 제스처, 장면, 말장난이 만들어낸, 말하자면 익숙한 웃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웃음이 아닌 익숙한 것의 성취다. 물론 이게 나쁜 것은 아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흥행하는 영화에 미학적 성취까지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보듬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알다시피 천만 영화는 텍스트 차원을 넘어 사회적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영화를 보고 느끼는 천만 명의 감정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극한직업’의 흥행은 씁쓸하다. 익숙한 웃음에 대한 관객의 뜨거운 호응은 역설적이게도 딱히 웃을 일 없는 한국사회의 우울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끝내기에 뭔가 미심쩍은 지점이 있다. ‘극한직업’의 웃음은 익숙함을 넘어 수상하다. 그것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작위적 우연을 가리는 도구로 작동한다. 이상하게도 영화는 위장 개업한 치킨 가게가 맛집으로 거듭나는 구체적인 실상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대체 그곳은 어떻게 그리도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가? 왕갈비 식당 아들인 형사 한 명이 타고난 재능으로, 말하자면 어쩌다 보니 우연히, 세상에 둘도 없는 맛있는 치킨을 만들어낸다는 게 영화가 제시한 해명의 전부다. 그러니까 영화는 해명해야 할 때 웃겨버린다. 가게의 입지, 치킨 조리법, 배달 네트워크 등과 관련된, 이 시대 진짜 자영업자가 처한 생존의 디테일은 웃음과 함께 가볍게 휘발된다. 그 성공은 판타지다.

이제야 말하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은 형사들이면서, 더 중요하게는 패배자들이다. 범인 체포는 미숙하고, 후배보다 승진이 늦으며, 상사에게 혼나고, 팀 해체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스크린 밖 우리가 영화에 접속할 수 있는 정서적 자리를 마련한다. 어쩌면 우리는 익숙한 웃음에 접속한 게 아니라 우리와 닮은 정의로운 패배자들의 성공에, 그 판타지에 접속한 것인지도 모른다. ‘극한직업’의 웃음이, 그 엄청난 흥행이 헛헛한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성공 판타지에 대한 호응은 현실에서의 성공 불가능성을 차갑게 반증하기 때문이다.

박우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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