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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와 노무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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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영희 전 한양대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상적 대부(代父)라 할 수 있다. 그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같은 책은 1970~80년대 운동권의 의식화 교재였다. 81년 부산지역 학생들이 이런 책들을 읽다가 붙잡혔다. 부림(釜林)사건이다. 변호사 노무현은 학생들을 변호하다 뒤늦게 이 책들을 읽었고 그 후 인권.노동 변호사로 바뀌었다.

이 전 교수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인간개조 실험"이라고 새겼다. 2003년 7월 노 대통령은 중국 방문 중 칭화대 학생이 '존경하는 중국 정치인'을 묻자 덩샤오핑과 함께 마오쩌둥을 꼽았다. 문화대혁명의 참혹한 인권.역사 유린은 차치하고라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공동 전범(戰犯)을 존경하는 인물로 거론한 것이다. 대통령의 뇌리 속에는 '전환시대의 논리'에 적혀 있던 충격적인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리라.

지난 15~20일 국제한민족재단(상임의장 이창주, 이사장 정재윤)은 러시아에서 제7차 세계한민족포럼을 열었다. 남북 화해, 한.러 협력이 주제였다. 이 전 교수는 기조연설에서 자신의 고전적인 반미 주장을 다시 역설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남한은 초강대국 미국에 실질적인 영토.군사.정치적 권리의 자주성을 예속당하고 있다."

18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에서 기자는 이 전 교수와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지방선거 결과가 충격입니다.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적어요. 국민이 표로 탄핵한 거예요."

-집권당 참패의 가장 큰 원인은.

"정권 담당자들의 언행이 경박해요. 열린우리당이 창당됐을 때 김원기 의원이 부탁을 해와 의원 40여 명에게 강의한 적이 있어요. '중국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했지요. 생각과 언행의 무게를 주문한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핵심인사들은 교수님의 책을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정권의 실패에 교수님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듣기로는 그들이 나의 책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나에게도 일부 간접적인 책임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책임이 있다는 건 책을 쓸 때 세상을 잘못 보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역사는 조금 길게 볼 필요가 있어요.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자본주의가 일방적으로 기세를 떨치면 반작용으로 새로운 흐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일부 책임이라는 건.

"당시(70년대) 공산권 정보를 수집하는 데 제약이 있어 사실 인용에 틀린 게 있었습니다. 홍위병의 문화 파괴적 행태 같은 게 빠져 문화대혁명 묘사가 부분적으로 틀렸지요."

-결국 '변호사 노무현'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잘못된 사실을 가지고 중국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니 '존경하는 마오쩌둥'같은 얘기가 나온다고 봅니다. 책들을 다시 쓸 생각은 없습니까.

"기력이 없어 어렵습니다(이 전 교수는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아직도 오른손을 심하게 떤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인간의 이상형에 대한 실험은 계속될 거라고 봅니다."

'다시 쓰는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은 없을 것 같다. 기력도 기력이지만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수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올해 77세. 러시아에서 바라본 이영희는 화석(化石)이 되고 있었다. 자신은 '저항 지식인의 길'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그가 '노무현 그룹'에 끼쳤던 영향 때문에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한국의 현대사가 홀대를 받고 있다.

김진 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