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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탑골공원은 ‘슬럼가’인데, 적산가옥은 역사문화공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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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호 29면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이 있는 종로3가를 지날 때마다 씁쓸한 느낌이 든다. 탑골공원과 그 주변은 마치 테두리 선을 그어놓은 듯하다. 탑골공원은 부드럽게 말해서 ‘실버 타운’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낙후된 ‘노인 슬럼가’,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었고 언제까지 이렇게 둘 것인가.

적산가옥을 한옥마을로 오해 우려 #‘추억 상품’처럼 변모한 세태 유감 #정부, 3·1운동 100주년 맞아 #탑골공원 일대부터 정비했으면…

어르신들의 문화생활은 존중돼야 한다. 다만 탑골공원이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 아니었다면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엉뚱한 사건이 터졌다. 최근 손혜원 의원이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다. 필자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목포의 ‘적산가옥’을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독립운동 성지는 방치하고 적산가옥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해도 좋은가.

박완서(1931~2011)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생각난다. 해방기의 ‘적산가옥’ 내용이 나온다. ‘적산’은 흔히 적의 재산을 의미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일본인 재산 처리가 주요 이슈가 되었다. 이때 일단 국가에 귀속됐다가 일반에 매각된 일본인 재산 중 주택을 적산가옥이라고 불렀다.

박완서 가족은 고향 개성을 떠나 서울로 온 후 작은아버지 댁에 잠시 기거했다. 한강로에 있던 그 집이 적산가옥이었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일본 사람들이 쓰던 물건이나 가옥은 다 국가에 귀속될 적산이니 행여 돈 주고 사고 팔거나 연고권을 주장하지 말고 고스란히 버리고 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건 신문 사설이나 군정청의 경고문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 산다는 게 위법행위처럼 창피하고 싫었다.”

선데이칼럼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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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에 산다는 게 창피하고 싫었다’고 그는 기억하고 있다. 한 개인의 기억이니까 불확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봐도 90년대까지는 대개 적산가옥을 곱지 않게 보는 시각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런 기억은 이제 옛 유행가가 된 것일까. “대부분의 적산가옥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다 차지했다”는 박완서의 또 다른 기억도 박물관 속 한 페이지로 남을 것 같다. 박완서가 이 소설을 처음 낸 것은 1992년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적산가옥이 ‘추억 상품’으로 변하는 듯하다.

‘근대역사문화공간’은 문화재청이 지난해 8월 도입한 면(面) 단위 근대공간 관리정책이다. 일제강점기에 번성했거나 해방 후 경제개발기에 번성했다가 그 이후 산업구조 개편에서 소외되거나 낙후된 도시가 대상이라고 한다. 도시재생 사업의 일종인 셈인데, 왜 굳이 적산가옥을 첫 대상으로 선정한 것일까.

문화재위원인 안창모 경기대 교수에게 ‘적산가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도 좋으냐’고 묻자 “적산가옥이란 표현부터 좀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안 위원은 “적산가옥을 근대공간으로 다루는 것은 칭찬하자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으로 남기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적산가옥은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해방 이후 미처 청산하지 못한 친일 문제와 연결돼 있다”며 “식민지 문제 관련 세계의 사례를 보면 인적 청산 먼저 하고 물적 청산은 남겨서 교훈으로 삼곤 하는데, 우리는 인적 청산을 못 한 역사 때문에 물적 청산을 안 하면 청산을 못 한 것 같은 것으로 보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적산이란 말은 ‘property of enemy’의 번역어다. 일본인이 남겨놓은 재산이 미 군정청으로 넘어갔다가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므로 정확히는 ‘귀속 재산’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제도가 ‘좋은 의도’로 출발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결과는 다른 것 같다. 좋은 의도보다는 부동산값 상승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흐름 속에 ‘적산가옥’이 ‘추억 상품’으로 각광 받으며 미화된다면 이 정책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적산가옥이 근대역사문화공간이란 미명 아래 많은 예산 지원을 받으며 예컨대 전주 한옥마을 식의 전통 보존처럼 오해될까 봐 하는 소리다.

그리고 여전히 최초의 의문이 맴돈다. 근대역사문화공간이란 근사한 이름을 붙인 정부사업이라면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낙후된 탑골공원 일대를 정비하는 일부터 먼저 하면 좋지 않았을까.

탑골공원이 1897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공원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망명’(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이후 1897년 10월 대한제국 창건 사이에 만들어진 독립협회·독립문·독립공원 등 일련의 ‘독립운동 사업’과 흐름을 같이 한다는 사실도 새롭게 조명해봐야 할 것이다. 3·1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기원이라며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까지 말들은 많이 하면서 정작 그 깊은 의미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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