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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병도 깨져선 안돼! 애주가의 위스키 수송작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4) 

힘든 만큼 보람 있었던 위스키 이사. 정리까지 모두 끝난 뒤의 모습. [사진 김대영]

힘든 만큼 보람 있었던 위스키 이사. 정리까지 모두 끝난 뒤의 모습. [사진 김대영]

얼마 전 이사를 했다. 보통은 이사 갈 집의 상태, 회사까지의 거리, 집 주변 편의성, 층간 소음 등을 우선 신경 쓸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위스키 덕후의 최우선 과제는 역시 위스키다.

그동안 모은 위스키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옮길 것인가, 새로 이사 갈 집에 술병 적재공간은 충분한가… 특히 안전에 대한 불안감은 엄청났다. 발품 들여 모은 위스키가 한 병이라도 깨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포장 이사는 영 못 미더웠다. 그래서 위스키 수십 병을 직접 나르기로 결정했다.

안전한 위스키 나르기의 기본은 포장이다. 이사 전날, 집 근처 문구점에서 포장용 에어캡 한 꾸러미를 샀다. 그리고 사랑하는 위스키병을 하나씩 꽁꽁 싸맸다. 병당 에어캡 세 바퀴. 두 바퀴는 왠지 불안하고, 네 바퀴는 너무 많이 쓰는 거 같아서 그렇게 됐다. 이렇게 위스키를 에어캡으로 감고 테이프로 밀봉했다. 금방 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2시간이나 들었다. 포장이 끝나니 손목과 허리에 통증이 찾아왔다.

큰 포장용 에어캡이 위스키 수 십 병을 싸고 나니 이것밖에 안 남았다. [사진 김대영]

큰 포장용 에어캡이 위스키 수 십 병을 싸고 나니 이것밖에 안 남았다. [사진 김대영]

다음은 적재. 안전한 적재를 위해 여행용 캐리어를 투입했다.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많은 술병을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캐리어 하나에 위스키가 20병 가까이 들어갔다. 또 상자가 있는 위스키는 병 사이 간격이 없도록 큰 상자에 채워 넣었다. 흔들림에 따른 파손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좀 비싼 위스키는 배낭과 에코백에 세 병씩만 담아 안전성을 극대화했다. 반면, 싼 위스키는 ‘깨지면 하늘의 계시라 믿자’는 생각으로 비닐 포대에 잔뜩 담았다. 물론, 비닐이 찢어지지 않도록 두 겹을 쓰는 센스는 발휘했다.

차곡차곡 박스에 담긴 위스키(왼쪽)와 각종 운반도구에 실린 위스키들(오른쪽). [사진 김대영]

차곡차곡 박스에 담긴 위스키(왼쪽)와 각종 운반도구에 실린 위스키들(오른쪽). [사진 김대영]

이삿날 아침이 밝았다. 이사를 도와주기로 한 친구와 각종 운반 도구에 담긴 위스키를 차 트렁크로 옮겼다. 살던 집이 5층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이고 내려가느라 고생을 좀 했다. 한겨울 새벽 한파에도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 새집은 살던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인데, 아주 천천히 달려 10분 정도 걸렸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덜컹거림이 신경 쓰였지만, 지난 밤 함께 한 포장용 에어캡을 믿어보기로 했다.

새집에 도착해 운반 도구 속 위스키를 꺼낼 때 느낌은 시험 성적을 확인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국어, 수학, 영어 모두 망쳐도 좋지만, 밤새 매달린 국사만큼은 백 점을 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살림살이가 다 망가지더라도 위스키만큼은 안전했으면 하는 마음도 그와 똑같았다.

시험 문제를 틀려도 배점이 낮은 게 틀렸기를 바라듯, 위스키가 깨졌더라도 싼 위스키가 깨지길 바랐다. 드라마 ‘SKY 캐슬’의 김주영 코디가 “안전하게 위스키를 옮기려면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며 다가왔다면, 딸의 성공을 위해 모든 걸 바친 한서진처럼 위스키의 안전을 위해 내 모든 걸 바쳤을지도 모르겠다.

단 한 병도 깨지지 않고 안전하게 나른 위스키. [사진 김대영]

단 한 병도 깨지지 않고 안전하게 나른 위스키. [사진 김대영]

다행히 위스키는 단 한 병도 깨지지 않았다. 포장용 에어캡은 여전히 매끈매끈했고, 위스키 제군들은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쟁에 승리한 군대의 군인들처럼 사기충천해있었다. 이제 남은 건 포장용 에어캡을 잘 벗겨낸 후, 미리 정해둔 위스키 창고에 위스키를 잘 넣는 일. 의외로 포장용 에어캡 벗기는 게 포장하는 것만큼 시간이 들었지만, 안전하게 위스키를 옮겼다는 안도감이 피로를 이겨냈다.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었던 포장용 에어캡 벗겨내기. [사진 김대영]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었던 포장용 에어캡 벗겨내기. [사진 김대영]

햇빛이 없고 서늘한 곳에 위스키를 다 쌓고 나니 비로소 긴장이 탁 풀렸다. 곧바로 다른 이삿짐이 들어와서 쉬지도 못하고 짐 정리를 시작했지만, 시험에서 백 점을 맞은 뒤의 하굣길처럼 마음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봄이 되면 이사하는 집이 늘어난다. 혹시 집에 위스키를 비롯해 술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사할 때 이 글이 참고될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댁내 두루 술의 안전이 함께하시길.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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