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1)
크리스마스엔 가족이나 연인과 와인 한 잔을 떠올리기 쉽다. 이에 발맞춰 12월이 되면 와인 샵들이 할인을 시작한다. 하지만 진정한 위스키 마니아들은 크리스마스라고 와인에 한눈팔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도 위스키 마시는 하루일 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크리스마스에 왜 위스키를 마시냐는 질문에 멋있게 대답할 거리를. 와인 마시자는 친구들의 마음을 위스키로 돌릴 한 마디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만들어진 위스키
1968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 글렌파클라스 증류소를 대대로 지켜오던 그랜트(Grant) 가문이 있었다. 당시 오너였던 존 그랜트(John Grant) 씨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위스키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 위스키는 보통의 위스키와 달랐다. 오크통에서 뺀 위스키는 물을 섞어 40도 정도의 도수를 만든다.
그런데 그는 물을 하나도 섞지 않고 105프루프(Proof : 알코올을 측정하는 단위, 알코올 단위로는 60도)로 병입했다. 이런 고도수의 위스키는 알코올 향이 너무 세서 마시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지만, 묵직한 바디감과 함께 몸 안이 후끈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추운 스코틀랜드의 겨울, 가족과 친구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던 존 그랜트의 마음이 담긴 걸까.
이를 계기로 글렌파클라스 증류소는 ‘글렌파클라스 105’라는 60도짜리 위스키 제품을 발매했다. 이는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 : 오크통에서 위스키를 뺀 후, 물을 첨가하지 않고 병입하는 제품) 위스키의 첫 정식제품이었다. 그 후로 다른 증류소들도 60도에 가까운 위스키 원액 그대로의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맥캘란CS, 아벨라워 아부나흐 등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이 고도수위스키들은 크리스마스에 짝이 없어 얼어붙어 버린 이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들어줄 만큼 강렬하다.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피딕
세계 싱글몰트 위스키 판매량 1·2위를 다투고 있는 스코틀랜드 글렌피딕 증류소. 그 시작은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에 윌리엄 그랜트 씨가 증류소를 세웠고, 이듬해인 188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첫 증류가 시작됐다.
왜 크리스마스에 증류소 가동을 시작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글렌피딕’이라는 증류소 이름을 엮으면 연상되는 게 있다. ‘글렌피딕’은 게일어로 ‘사슴 계곡’이라는 뜻. ‘크리스마스’와 ‘사슴’을 연결하면 ‘루돌프’가 떠오른다. 사슴과 12월 25일에 시작된 위스키. 크리스마스에 가족이나 연인과 한잔하며 나누기 좋은 이야깃거리다.
크리스마스엔 더 강렬하게… 빅피트 크리스마스 에디션
더글러스 랭(Douglas Laing)사의 빅피트 위스키는 매년 크리스마스 에디션을 내놓는다. 빅피트는 아드벡, 쿠일라, 보모어, 그리고 포트엘렌 증류소 등 스코틀랜드 아일라 지역 위스키를 블렌딩해 만드는데, 도수는 46도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에디션은 위스키에 물을 섞지 않고 50도대로 높여 출시한다. 또 일반 판과 달리 어느 증류소 위스키를 블렌딩하는지도 비공개다.
또 하나의 재미는 라벨에 그려진 아저씨. 빅피트 위스키는 라벨에 아일라 섬에 사는 ‘피트 아저씨(Big Pete)’ 캐릭터를 그려 넣었다. 그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데, 아일라 섬의 피트가 담긴 위스키를 마시면 이런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에디션에서 다양한 모습을 선보인다. 산타가 되어 썰매를 타거나 지붕에 들어가기도 하고, 매서운 추위에 머리와 수염 등이 얼어붙기도 한다. 위스키 팬들은 매년 빅 피트 크리스마스 에디션에 어떤 모습의 피트 아저씨가 등장할지 기대한다.
로맨틱, 성공적, 1990년 12월 24일
개인 소장 위스키 중에 12월 24일에 만든 위스키가 있다. 블랙애더 부나하븐 1990. 왜 부나하븐 증류소 직원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쉬지 않고 위스키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증류 날짜 덕에 내겐 더 특별한 위스키가 됐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시려고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난 솔로였어. 이 위스키로 28년 전 크리스마스이브를 2018년으로 데려오자. 외로웠던 1990년의 오늘도 너와의 행복으로 채워지도록.”
위 문장의 숫자 28이 29로 바뀌지 않길 바란다.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매체팀 대리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