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시정연설서 한국 통째로 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베 신조(安倍晋三)일본 총리가 28일 일본 국회 시정방침연설에서 한국 관련 부분을 통째로 뺐다.
시정방침연설은 우리의 정기국회 시정연설에 해당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교도=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교도=연합뉴스)]

총리관저가 사전 배포한 연설문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 관련 부분은 비중이 크든 작든 관계없이 아베 총리의 연설 중 외교분야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지만 이번엔 사라졌다.

사전배포 원고…한국 부분 빼고 '근린외교'로 표현 #'한국' 표현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때 딱 한 차례 #중동 평화 외교와 아프리카 국가 지원문제는 강조 #의도적 무시 전략? 지지율 상승 뒤 치고 빠지기? #'레이더' 강경 대응 요구하는 국민 여론도 고려 #닛케이 조사 62% “한국에 더 강하게 대응해야” #"강경발언 쏟아질 日국회,한국은 3.1절이 고비"

‘한국’이란 단어가 딱 한 차례 등장한 건 북한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밝힌 대목에서였다.
아베 총리는 "북한과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정상화를 목표로 하겠다"며 "그를 위해 미국과 한국 등 국제사회와 긴밀히 연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북동아시아를 안정된 평화와 번영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와의 발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근린외교를 힘있게 전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근린외교를 펼칠 대상으로 한국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지난해 같은 연설 아베 총리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는 지금까지의 양국 간 국제약속, 서로의 신뢰 축적 위에서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협력관계를 심화시켜 가겠다"고 말했다.

2017년 12월말 한국 정부가 한ㆍ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검증 결과를 발표하고 합의 파기 논란이 일면서 양국관계가 흔들렸던 때다.

위안부 합의를 염두에 두고 ‘국제 약속’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2017년 연설에서 포함됐던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국가’라는 표현을 뺐다.

아베 총리는 그동안 양국 관계가 어떻게 출렁이느냐에 따라 연설 내용을 조절해왔다. 2012년 재집권 직후인 2013년 1월 연설때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국가로, 21세기에 맞는 미래지향적 파트너십 구축을 목표로 협력해 나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방위성은 지난달 20일 동해상에서 발생한 우리 해군 광개토대왕함과 일본 P-1 초계기의 레이더 겨냥 논란과 관련해 P-1 초계기가 촬영한 동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지난달 28일 공개했다. [일본 방위성 유튜브 캡처]

일본 방위성은 지난달 20일 동해상에서 발생한 우리 해군 광개토대왕함과 일본 P-1 초계기의 레이더 겨냥 논란과 관련해 P-1 초계기가 촬영한 동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지난달 28일 공개했다. [일본 방위성 유튜브 캡처]

그런데 대법원 징용 판결과 레이더 조준, 위안부 재단 해산 문제로 관계가 더 악화되자 올해엔 한국 관련 대목 자체를 아예 삭제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대신 미ㆍ일 동맹 강화, 중국과의 관계개선, 러시아와의 영토 협상, 북한 문제는 자세히 설명했다. 심지어 중동평화와 아프리카 개발 지원문제까지도 언급했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회견 모두 발언에 일본에 대한 언급이 없자 일본 언론들과 정부내에선 "일본에 무관심하다","한·일관계 개선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신년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신년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날 연설은 결과적으로 이를 똑같이 되갚는 모양새가 됐다.

아베 총리의 이런 태도는 한국에 대한 강경 대응을 바라는 국민 여론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28일 공개된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의 여론조사(25~27일)에서 레이더 조준 문제에 대해 "정부가 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이 62%에 달했다.
“조용히 지켜봐야 한다”는 24%, “조금 더 한국측 주장을 들어야 한다”는 응답은 7%뿐이었다.
아베 총리를 지지하지 않는 층에서도 '더 강한 대응'을 요구하는 답변이 57%나 됐다.

요미우리 신문 조사(25~27일)에선 "한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계속)한다면 관계가 개선되지 않더라도 할 수 없다”는 응답이 71%였고,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이 한국에 양보해야 한다”는 응답은 22%에 그쳤다.

닛케이 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전달 보다 6%포인트 오른 53%,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7%포인트 하락한 37%였다.

요미우리 조사에서도 지지율은 2%포인트 오른 49%, ‘지지하지 않는다’는 5%포인트 하락한 38%였다.
아베 내각의 지지율 상승세를 놓고는 "총리에게 기대하는 분야로 외교ㆍ안보를 선택한 이들이 8%포인트나 상승했는데, 여기엔 레이더 문제가 영향을 미쳤다"(닛케이)는 분석이 나온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일본측 소식통은 "아베 총리 입장에선 이미 한·일 관계로 인한 지지율 상승 효과를 누린 만큼 구태여 시정 연설에서 한국을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지금의 일본 내 여론 흐름상 오히려 언급하지 않는 것이 한국을 배려한 것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종의 '치고 빠지기'전략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28일 시정연설에 이어 연일 국회에 출석하는 아베 총리에겐 한국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여야의원들의 질문이 쏟아질 수 밖에 없다"며 "아베 총리도 어떤식으로든 동조하는 발언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150일 동안 이어지는 일본의 통상국회(정기국회) 일정, 한국내 반일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3ㆍ1절이 양국 관계엔 고비"라고 전망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