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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국가' 명단서 빠진 한국···CES서 드러난 韓 벤처 민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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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에스토니아ㆍ스위스ㆍ핀란드ㆍ미국ㆍ싱가포르…’
‘혹시’ 했으나 ‘역시’였다. 다시 읽어봐도 ‘한국’은 없었다. 미국 소비자기술협회(CTA)가 꼽은 ‘혁신 챔피언’국가 명단 얘기다. ‘소비자가전전시회(CES)’를 주최하는 CTA는 ‘CES 2019’가 열린 이달 초 혁신 챔피언 16개국을 발표했다. 벤처 정책이 잘 돌아가 벤처가 융성한 나라들이다. 창업하기 쉬운 정도, 세금 제도, 인적 자원 등 14개 항목을 비교 평가해 선정했다. 올해가 2년째다. 한국은 2년 연속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정평이 난 기술 선진국은 물론, 뉴질랜드ㆍ포르투갈ㆍ체코ㆍ리투아니아 등에도 점수가 뒤졌다. CES를 통해 밝혀진 한국 벤처 정책의 민낯이다.

관람객으로 북적이는 CES 프랑스관. 권혁주 기자

관람객으로 북적이는 CES 프랑스관. 권혁주 기자

한국 벤처의 현주소는 CES의 벤처 전문 전시관인‘유레카 파크(Eureka Park)’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곳을 압도한 건 프랑스였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서부터 그랬다. ‘프랑스관’이라는 이름 아래 152개 벤처 명단이 나열됐다. 인공지능(AI)ㆍ스마트시티ㆍ증강현실 등 첨단 분야를 망라했다. 36개 업체가 참여한 한국관과 극명히 대비됐다.

CES 발표 국가별 혁신 성적표 #한국은 포르투갈·체코에도 뒤져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 빚은 결과 #각국 기술 전시장 CES 벤처관서 #프랑스 등 조명 집중, 한국은 뒷전 #해외 마케팅 부족해 벤처 몸값 바닥 #

프랑스관 위치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였다. 152개 벤처 모두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 표식을 공통으로 내걸고 저마다 기술을 전시했다. 안경 없이 보는 3차원 TV, 주인이 부르면 와인ㆍ맥주와 스낵을 싣고 가는 ‘서빙 로봇’ 등도 있었다. 전시관 통로는 지하철을 탄 듯 북적였다.

프랑스는 2014년부터 벤처들이 ‘프랑스’ 브랜드 아래 모여 CES에 참가했다. 정부 기관인 ‘비즈니스 프랑스’가 주관한다. 비즈니스 프랑스는 한국의 KOTRA처럼 수출 마케팅 지원과 해외 투자 유치를 담당한다. KOTRA와 차이점은 벤처 육성이다. 벤처에 투자한 뒤 마케팅과 경영 지원을 해주는 ‘액셀러레이터’ 역할까지 한다. 현재 250개 벤처를 키우고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비즈니스 프랑스의 에릭 모랑 기술ㆍ혁신 서비스 담당 이사는 이렇게 답했다. “벤처는 글로벌 기술 마케팅을 해야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글로벌 마케팅은 원래 비즈니스 프랑스의 업무다. 그러니 액셀러레이터 역할은 당연한 것 아닌가. CES 참가 역시 가장 강력한 글로벌 마케팅 수단이기에 하는 것이다.”

CES 유레카 파크 한복한에 자리한 이스라엘관. 권혁주 기자

CES 유레카 파크 한복한에 자리한 이스라엘관. 권혁주 기자

프랑스뿐 아니다. 이스라엘은 유레카관 한복판에 국가관을 마련했다. 바로 옆은 오렌지색으로 전시 부스를 통일한 네덜란드였다. 두 곳 모두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뤘다.

KOTRA가 벤처 36곳을 모아 온 한국관은 입구 반대쪽 끝이었다. 프랑스관 등에 비하면 한산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나마 발전한 것이었다. 지난해엔 한국관이 아예 없었다. 벤처를 키우겠다면서도 글로벌 마케팅을 지원할 생각은 부족했다. 이번 CES에서 외진 곳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CES는 과거 참여 기록 등을 살펴 자리를 배정한다. 첫 출전인 한국관은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유레카 파크를 둘러본 한 벤처 기업인은 “안타까운 비극”이라고 한탄했다.

한산한 CES 유레카 파크의 한국관. 관람객이 별로 없어 한산하다. 권혁주 기자

한산한 CES 유레카 파크의 한국관. 관람객이 별로 없어 한산하다. 권혁주 기자

글로벌 마케팅은 벤처 스스로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갓 창업한 벤처에겐 그런 역량이 부족하다. 비즈니스 프랑스가 자국 벤처의 해외 마케팅을 돕는 이유다. 이 분야에서 뒤진 한국은 벤처 몸값이 바닥이다. 비슷한 미국 벤처보다 몸값이 수십 분의 1 정도라는 게 정설이다. 내비게이션 ‘김기사’만 봐도 그렇다. 카카오가 650억원에 인수했다. 반면 기술이 비슷한 이스라엘 벤처 ‘웨이즈’는 구글이 그 20배 가까운 1조2000억원에 사들였다. 물론 ‘김기사’는 언어 장벽 때문에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기 힘들다. 하지만 언어가 중요치 않은 기술 시장은 얘기가 다르다. 그래서 벤처는 글로벌 마케팅이 절실하다. 그러나 CES에서 보듯, 국내 벤처 정책은 여태껏 글로벌 마케팅을 도외시했다.

이뿐 아니다. 국내 벤처기업인들은 ‘정책’이란 단어가 나오면 불만을 우수수 쏟아낸다. 다음은 벤처인들이 호소하는 문제들이다. 하나같이 익명을 부탁했다.

“인공지능(AI) 연구개발(R&D)에 필요한 GPU 서버란 장비가 있다. 작동할 때 비행기 엔진 돌아가는 것 같은 굉음이 난다. 옆에 두고는 시끄러워 일할 수 없다. 별도의 서버 실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정부는 GPU 서버를 사게끔 지원하면서, 서버 실을 따로 두겠다면 ‘안 된다’다. 대체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건지…. 심지어 ‘AI 혁신 허브’를 내세운 벤처 단지에도 GPU 서버 실이 없다.”

“우리 분야는 붐이 일어 개발자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돈을 많이 줘야 좋은 개발자를 데려올 수 있다. 다행히 인맥을 통해 연봉을 시장 평균의 85~90%만 주기로 하고 개발자를 구했다. 그런데 이 임금이 정부지원 사업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허가를 구했더니 정부는 당장 ‘연봉이 많다’고 태클을 걸었다. 시장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대졸 초임만 비교한 것이었다. '그 정도 안 주고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해도 별무신통이었다. ‘비슷한 일하는 다른 벤처 개발자의 연봉 증빙을 떼어 오라’는 말만 들었다.”

“기본적으로 벤처기업인을 안 믿는다. 특허 때문에 변리사를 쓰는데도 왜 그 사람을 쓰는지 증빙 서류를 내라고 한다. 입찰 견적을 받아 싼 곳을 택하라는 얘기다. 하지만 조그만 창업 벤처가 입찰을 할 수 있겠나.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견적서를 받아와야 한다. 변리사 사무실에 가서 한참 기술을 설명한 뒤에 견적서를 받아오려면 시간도 많이 들고, 변리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국내 벤처를 외국 투자자에게 알리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이 정말 없다. 요즘은 ‘한국 벤처가 몸값이 싸다’는 소문이 나서인지, 외국 투자자에게서 연락이 온다. 나도 받았다. 그러면서 ‘한국 내 다른 벤처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정부가 외국 투자자들에게 벤처 소개를 잘 해주면 자금 흐름이 원활해져 벤처가 훨씬 융성할 것 같다.”

최근에는 정부가 지원하면서 ‘정규직 채용’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고 한다. 한 벤처인은 “1500만~2000만원 지원하면서도 정규직 채용을 요구한다. 지원받는 게 오히려 부담이다. 사후 평가에서도 채용 여부를 중요하게 보겠다더라”고 전했다. 벤처가 쑥쑥 자라 고용을 늘리도록 하는 게 아니라, 일단 채용부터 하고 보라는 식이다. 그야말로 앞뒤가 바뀐 벤처 정책이다. 소득주도 성장이 빚은 고용 재앙의 해법을 엉뚱한 데서 찾는 것이다.

CTA의 ‘혁신 챔피언’ 명단에 한국이 빠진 것은 이렇게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벤처 정책이 빚은 결과다. 특히 올해 평가에서 한국은 ‘승차 공유’가 최하인 F를, 숙박공유 같은 ‘단기 렌털’분야는 D를 받았다. 하나같이 정부가 이해관계자들 눈치 보기에 바빠 해결을 뒷전에 미룬 분야들이다. 평가 대상 61개국 중에는 24위다. 대상 국가에는 페루ㆍ이집트ㆍ콜롬비아ㆍ요르단ㆍ모로코ㆍ르완다 같은 신흥국도 다수 포함됐다. 그 가운데 한국의 혁신 성적표는 중위권이다.

벤처는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혁신 성장’의 핵심축이다. 조선ㆍ건설 등 주력 산업이 한계를 드러낸 지금,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시급히 육성해야 할 분야다. 그런데도 그 정책과 운영은 삐거덕거리기만 한다. 이래서야 벤처가 잘 자랄 수 있을까. 유레카 파크를 돌아본 한 벤처인의 말이 귀에 맴돈다. “유레카 파크는 개별 벤처 기업이 아니라 각 나라의 기술 전시장이었다. 아니, 기술 전쟁터였다. 거기서 그 나라의 미래가 보였다. 그런데 한국은….”

머리띠형 뇌 촬영장치 개발한 KAIST 교내 벤처

CES서 글로벌 대기업 주목 받아
바디프랜드는 '2019 혁신상' 수상

KAIST 교내 벤처 '오비이랩'이 개발한 머리띠형 뇌 영상 촬영 장치. 권혁주 기자

KAIST 교내 벤처 '오비이랩'이 개발한 머리띠형 뇌 영상 촬영 장치. 권혁주 기자

CES에서 한국 벤처관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괄목할 성과를 올린 업체들도 있었다.

KAIST 교내 벤처인 ‘오비이랩(OBE Lab)’은 CES를 통해 연 매출 300억 달러(약 34조원)인 글로벌 의료장비 회사와 연결됐다. 배현민(47ㆍ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가 창업한 오비이랩은 뇌 활동 영상 촬영 장치를 만든다. 거대한 MRI 등으로나 할 수 있던 작업을 조금 두툼한 머리띠 정도 크기의 장비로 가능케 했다. 근적외선을 이용해 뇌혈관 속의 산소 농도를 잡아내는 원리다. 오비이랩은 국내에서도 대형 병원들과 함께 뇌경색 환자의 수술 후 회복도 측정 시험 등을 하고 있다. 치매 연구도 진행 중이다. 배 교수는 “CES 부스를 방문한 글로벌 대기업이 사업 논의를 위한 추가 자료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스마트레이더시스템’은 CES에서 만난 외국 업체들과 실리콘밸리에서 투자ㆍ납품 협의를 했다. 이 회사는 자율주행차용 감지장치를 만든다. 주변에 있는 게 차량인지 사람인지 자전거인지 판독하는 장비다. 흐리거나 비가 많이 오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존 장비의 성능을 크게 개선했다. 김용환(53) 대표는 “CES를 통해 알게 된 국내 투자자들과도 투자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오비이랩과 스마트레이더시스템은 ‘KAIST관’ 소속으로 참여했다. 한국관과는 별개다. KAIST가 자체 벤처로 CES에 전시관을 꾸린 것은 처음이다. 올해 5곳이 나왔다. “기술 창업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CES에 나오게 됐다”는 게 이 학교 최경철(55) 산학협력단장의 설명이다. KAIST는 또 예비창업자와 창업 3년 미만인 학생 33명이 CES를 참관토록 했다. 총동문회가 비용을 댔다. 차기철(61ㆍ인바디 대표) KAIST 총동문회장은 “세계 창업 기술 시장에 대한 지식을 쌓게 함으로써 창업 동력을 높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참관단이었던 연창학(25ㆍ기술경영학부 석사 휴학)씨는 “우리 기술이 결코 미국이나 글로벌 벤처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CES 2019 혁신상'을 받은 바디프랜드의 LBF-750. 권혁주 기자

'CES 2019 혁신상'을 받은 바디프랜드의 LBF-750. 권혁주 기자

안마의자 업체 바디프랜드는 ‘LBF-750’으로 ‘2019 CES 혁신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수퍼카 브랜드 람보르기니와 협력해 만든 제품이다.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의 좌석과 같은 디자인ㆍ기술로 만들었다. CES 전시 부스에도 안마의자와 함께 람보르기니를 들여놨다. 바디프랜드 측은 “미국 코미디언 스티브 하비가 CES에서 안마 체험을 하고 LBF-750 2개를 즉석 구매했다”고 전했다. 스티브 하비는 유명 퀴즈 쇼 ‘패밀리 퓨드(family feud)’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