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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황교안 정치멘토는 자신이 사형 외쳤던 '반미좌파' 김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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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국당 당권 도전 시동 건 ‘공안 보수’ 황교안의 이색 동지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다음 달 27일 열릴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 사실상 출마를 확정하면서 야권이 요동치고 있다. ‘황교안’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공안’이다. 지난 21일 대구를 찾은 황교안은 “대여 투쟁력이 약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자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사람이 누구냐. 그 말씀으로 대신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 황교안이 공안 검사 시절 사형을 구형했던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주역 김현장(69)과 친분을 맺고 정치적 조언까지 들어온 사실이 확인됐다. 김현장은 황교안에게 한국당 입당→당권→대권 도전이란 3단계 로드맵을 제시하며 출마를 강력히 권했다고 한다. 그를 21일 만났다.

황, 89년 피의자 김에게 ‘사형’ 외쳐 #출소뒤 김이 조문전화 걸며 교분 터 #박근혜 청와대서 조우 ‘특별한 인연’ #김, 황 사무실 찾아 ‘정치하라’ 설득 #입당 → 당권 → 대권 3단 로드맵 제시 #황 “김, 우리 헌법 가치 확고히 존중”

지난해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을 낸 황교안 전 총리를 찾은 김현장씨(왼쪽)가 사무실에서 황 전 총리와 기념촬영을 했다. 김씨는 ’황 전 총리가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해 경제 등 정책 전반에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지난해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을 낸 황교안 전 총리를 찾은 김현장씨(왼쪽)가 사무실에서 황 전 총리와 기념촬영을 했다. 김씨는 ’황 전 총리가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해 경제 등 정책 전반에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사람의 정치적 멘토가 됐다. 사연이 궁금하다.
“황교안을 처음 만난 건 내가 1989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출소 6개월 만에 재구속됐을 때였다. 남산 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에서 20일 넘게 고문받다가 검찰로 넘겨졌는데, 담당 검사가 황교안이었다. 분위기가 안기부 요원들과는 확 달랐다. 존댓말을 쓰며 사람으로 대해줬다. 내게 사형을 구형할 때도 부끄러워하며 낯을 붉히는 모습을 보였다. ‘깨끗한 검사’란 느낌이 들었다. ”
그 뒤로 어떻게 됐나.
“93년 석방 직후 황교안 모친상 부고를 접했다. 바로 전화해 ‘오늘이 발인인데 (못 가봐) 죄송하다’고 했다. ‘전화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하더라.”
그때 전향한 것인가.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민주화가 진전된 때였다. 이젠 내 투쟁 목표가 달성됐으니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황교안에게 전화도 한 거다.”
그 뒤로 황교안과 자주 만났나.
“아니, 못 봤다. 그러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발족시킨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 위원에 위촉돼 박 대통령이 주최한 연석회의에 나갔더니 황교안이 법무부 장관 자격으로 내 바로 옆에 앉아있더라. ‘오랜만입니다’고 인사를 나눴다. 이어 행사가 시작되자 내가 일어나서 ‘대통령보다 더 무서운 양반이 옆에 있어 간땡이가 얼어붙어 말을 못하겠다. 여기 황 장관이 옛날 내 담당 검사였다’고 했다. 좌중이 웃음바다가 됐다. ‘국민통합 다 되버렸네’라고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박 대통령도 웃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나?
“황교안이 그날 자리를 뜨면서 명함에 개인 전화번호를 적어주더라. ‘한가하면 법무부를 찾아와 (직원들) 격려해달라’고 하더라. 그러나 그 뒤로도 그를 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럼 언제 어떻게 친해진 건가?
“그 양반이 통진당 해산을 성사시킨 걸 보고 ‘황교안 아니면 안 되겠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는 경기고를 나와 성균관대를 갔다. 그가 서울대 갔으면 (대통령감) 못됐을 거다. 그는 성대를 가서 처음 1년은 학교 안 가고 고민만 했단다. 인간 냄새가 나지 않나. 그가 검사를 하면서도 바른 눈으로 세상을 본 이유다.”
그래서 정치적 조언을 시작한 건가.
“황교안이 2017년 5월 총리(대통령 권한대행)를 물러난 직후 전화를 했더니 ‘미국 갔다’고 하더라. 문자로 ‘잘했다. 사람 많이 만나고 오라’고 했다. 그가 귀국해 서초동에 사무실을 열고 2~3일 뒤 ‘오라’고 해서 갔다. 방에 가니 성경책 한권만 놓여있고 여직원도 없이 운전기사가 커피를 내오더라. 내가 ‘전국 방방곡곡에 한국당 찍겠다는 사람이 없다. 오직 당신이 나와야 찍을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 당신이 몸 던지면 나도 분골쇄신 돕겠다’고 했다.”
황교안의 반응은.
“‘같이 고민해보자’고 하더라. 워낙 신중한 사람 아니냐. 그래서 나는 ‘내 권유를 안 듣겠다면 이민 가시라’고 했다. 난 그가 꼭 정치를 해야 한다고 봤다. 계기는 통진당 해산이다. 그건 남로당 해산보다 더 힘든 일이다. 법의 수순 밟아서 해산시켜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1982년 3월 18일 김현장씨 주도로 부산 지역의 대학생들이 벌인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현장. [중앙포토]

1982년 3월 18일 김현장씨 주도로 부산 지역의 대학생들이 벌인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현장. [중앙포토]

‘반미 친북’이던 당신이 강경 우파로 전향한 이유가 궁금하다.
“주체사상은 초근목피에 시달리던 1920년대에나 맞는 이론이다. 그걸 지금 시대에 적용한다는 게 말이 되나?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홍순경씨가 대통합위원회 위원이 돼 나랑 만났는데 ‘공화국(북한) 영웅을 여기서 뵈네요’라며 놀라 자빠지더라. 김일성이 간부 회의에서 ‘김현장의 투쟁은 내 보천보 투쟁보다 더 영웅적’이라며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는 거다. 그뿐 아니다. 처음 공개하는데 그동안 저쪽(북한)에서 내게 우회적으로 많은 접근이 있었지만 다 거절했다.”
접근? 월북 권유를 뜻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거기(북)서 영웅 노릇 하느니 대한민국에서 무기징역 사는 게 더 낫다’고 했다. 그 뒤론 접근을 안 하더라.”
임종석과도 인연이 있나?
“그 친구가 89년 전대협·서총련 의장 할 때 내가 축사를 해 준 사람이다. 그 친구가 표정이 밝아 (내 충고를) 알아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주사파들은 책을 열권 이상 읽은 이가 없다. 읽은 책을 달달 외우고 ‘공부했다’고 한다. 세상을 보편적인 눈으로 볼 줄 모른다. 주사파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들이다.”
그 뒤 황교안과는 어떻게 됐나.
“수시로 그에게 전화해 옆구리를 쑤셨다. ‘당신이 검사할 때 사형 때린 사람이 대통령을 하라면 이유가 있는 거다.’라고 설득을 거듭했다. 용기가 생겼는지 (정치) 준비를 하더라”
정치적 조언을 해줬나.
“우선 당권과 대권 중 뭘 도전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아 ‘당권이 먼저다. 당권 가져본 경험 없이 대권에 도전할 순 없다’고 조언했다. 엊그제도 만났다. ‘솔직히 누구랑 허리띠 풀고 술 마시며 호형호제할 줄 모르지 않나’고 했다. 그러자 ‘왜 내가 못해’하며 웃더라. 그걸 보면 과거보다 많이 무뎌진 거로 봐야 한다.”
황교안이 당권을 놓고 겨룰 최대 라이벌은?
“오세훈이다. 김무성·홍준표는 결국 오세훈으로 단일화할 것이다. 그래도 최종승자는 황교안이 될 거다.”

황교안 본인은 김현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에게 물었다.

사형을 구형한 피의자와 친구가 됐다.
"공안 검사와 피의자는 그렇게 적대관계가 아니다. 서로 토론하는 사이랄까. 김씨가 출소한 뒤엔 잊고 지냈는데 장관 시절 대통합위원회에서 옆에 앉게 됐다. 특별한 인연이다. 연락을 주고 받게 됐다.”
공안통인 당신이 반미 좌파 원조 격 김현장과 연을 맺은 의미는?
"헌법의 가치에 대해 생각이 같은 사람은 언제든 같이할 수 있다.”
이제 정치인이 됐으니 진보좌파를 포용해 외연을 확장하려는 전략인가?
“진보적이니 그런 얘기보다는, 현시점에서 김 씨는 헌법 가치를 확고히 존중하는 입장이다. 그럼 쉽게 같이 할 수 있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