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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되는 조선대생 변사 진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5·18」을 앞두고 광주에서 발생한 조선대 이철규 군 (24) 변사 사건은 시국이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재야와 학생들은 벌써부터 「고문사」를 주장하며 투쟁을 벌일 기세마저 보이고 있어 사건의 진상 추이가 주목되고 있다.

<발견 현장>
변사체가 발견된 광주 상수도 제4수원지는 광주 중심에서 4km쯤 떨어진 무등산 입구 길목.
이곳은 무등산으로 통하는 아스팔트길을 끼고 있어 통행인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이군은 수원지 상류 다리에서 1백m쯤 떨어진 하류 오른편 물가에서 숨진 채 떠 있었다.
사체를 처음 목격한 저수지 관리인 최왕균씨 (52)에 따르면 10일 오전 11시30분쯤 저수지에 접한 관리인 숙소에서 기르는 개 4마리가 물가에서 심하게 짖는 소리가 나 내려가 보니 감색 Y셔츠와 쥐색 바지 차림의 이군이 하늘을 향한 채 떠 있었다.
이군의 사체는 손을 움켜쥔 채 떠 있었으며 얼굴이 까맣게 타있었고 오른쪽 눈알은 빠져 있었으며 왼쪽 눈알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배에는 물이 조금 밖에 차있지 않았다.
또 얼굴과 가슴에는 피멍이, 양 팔목에는 묶은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전신에 상처가 있었다. 또 주머니엔 주민등록증·도장·1천원짜리 3장이 있었다.

<사체>
이군의 유해는 발견 6시간30분만인 10일 오후 6시쯤 3천여 조선대생들에 둘러싸인 운구차편으로 사고 현장을 떠나 2시간만인 이날 오후 8시쯤 전남대 병원 영안실에 도착, 부검실에 안치됐다.
경찰은 이군의 사체를 광주 기독 병원에 안치하고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학생들은 조선대 병원에 안치해야된다고 주장, 한때 경찰과 대치했다.
그러나 이돈명 조선대 총장과 백형조 전남도경국장, 조선대 학생회 간부 등이 부검의 객관성을 위해 전남대 병원 영안실로 사체를 안치하는데 합의했다.
조선대생 1천여명은 이군의 유해가 안치된 전남대 병원을 교대로 철야 감시하고 영안실 셔터문을 내린 후 스크럼을 짜고 영안실 앞 광장과 정·후문, 앞 도로를 점거한 채 밤을 새우며 연좌 시의를 벌였다.

<부검>
이군의 사체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 이원태씨 등 집도의 4명, 조선대의대 서재홍·전홍준 교수, 전남대의대 조규태 교수, 광주적십자병원 전만기 외과 과장, 광주기독병원 선장신 병리과장 등 모두 9명에 의해 실시됐다.

<이군 행적>
경찰 조사 결과 이군은 3개월전 자취집을 나가 교내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이따금씩 이출할 때면 학교 버스를 이용했으며 이때도 가족들과 접촉을 갖지 않았다.
이군은 사전 영장이 발부된 지난 3일 오후 8시쯤 친구 심모군 (24)과 만나 심군이 구입한 구두와 흰 러닝셔츠를 받은 뒤 사라졌다.
이군은 이에 앞서 이날 오전 10시 조선대 앞 압록강 다방에서 후배인 박모양 (22)을 만나 박양의 생일파티를 열기로 하고 이날 오후 10시 광주댐 옆 H산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헤어졌다.
박양에 따르면 광주댐에 가기전 8시30분 광주시 산수동 5거리 모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에 따라 다방에 앉아 있었는데 9시20분쯤 이군이 전화를 걸어와 떨리는 목소리로 『옆에 사람이 있다』며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이군 주변>
전남 장성군 삼서면 대도리에서 이정진 (60)·황정자 (54)씨 부부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이군은 85년 광주 금호고를 졸업한 뒤 조선대 전자공학과에 진학, 1학년 때인 85년11월 「반외세 반독재 투쟁」 등 시위에 가담해 보안법 위반으로 광주고법에서 징역 3년·자격 정지 3년을 선고받은 뒤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 87년7월8일 사면으로 출소한 후 지난해 8월30일 복학했다.
이군은 교지 사건에 이어 4월8일 현대아파트 모델하우스 방화 사건 용의자로 추가 수배됐었다.

<문제의 논문>
이군은 「민주 조선」 창간호에 게재한 「북한 혁명과 건설」이라는 논문에서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가 된지 45년이 지났지만 남한은 여전히 그 예속과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주성을 유린당한 채 미제 침략의 역사, 냉혹한 시련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규정하고 『6월25일 확대된 한국전쟁은 미국이 북한 제도를 붕괴시키고 인민공화국을 파괴해전한국을 장악하기 위한 불의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광주=임광희·위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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