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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리성대동맥류|이웅구(연세대의대 교수·심장내과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팔다리·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키가 훤칠한 40대 약사 L씨가 아침운동을 하던 중 갑자기 가슴과 등이 터질 듯 아파 오며 숨이 차 응급실로 실려왔다.
몇 년 전부터 혈압이 좀 높은 것으로 알았으나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이 건강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L씨는 몇 가지 검사 끝에 「박리성대동맥류」가 상행대동맥에 생겼고 이것이 팽창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다.
대동맥의 벽은 세겹의 탄력 있고 튼튼한 구조를 갖고 있다. L씨와 같이 후리후리한 체격을 「마르팡씨 체형」이라고 하는데 「마르팡신드롬」이 있거나 동맥경화증이 있을 때 대동맥의 안쪽라이닝이나 가운데층에 이상이 생기면 운동시 별안간 혈압이 오르면서 분출되는 혈액의 물리적 힘에 의해 대동맥의 안벽과 중간층이 차례로 찢어진다.
이에 따라 맨 바깥껍질로만 가까스로 덮여있는 불룩한 혈괴를 만들며 팽창한다. 참으로 위험한 순간인 셈이다. 바깥껍질이 못 견뎌 터지면 출혈로 즉시 사망하지만 이 증세를 가진 사람 중 3분의 2는 용케 살아서 L씨처럼 병원응급실로 실려온다.
우리는 우선 여러 가지 주사약으로 빨리 혈압을 낮추고 심장의 수축력을 둔화시켰다. 몇 주일이고 이런 치료를 계속해 상태를 안정시킨 후 혈관조영으로 어디가 얼마나 터졌는지를 확인해보면 약물치료로 치유 가능한 경우와 수술해야 하는 경우가 각각 3분의 1이며 나머지 3분의 1은 어떤 치료로도 예후가 아주 나쁘다.
L씨는 그 어려운 혈관조영촬영 등을 무사히 끝내고 수술을 권유하자 미국으로 가 수술을 받겠다고 말했다. 「박리성대동맥류」수술은 심장·흉부·복부수술을 통해 가장 어렵고 칼을 대는 범위가 넓은 수술이다.
우리 팀이 수술의 예후를 1백% 보장하지 못하는 한 미국으로 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환자를 만류할 도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실시한 모든 검사 소견을 잘 정리해주고 행운을 빌면서 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다시 우리 병원에 되돌아왔다.
미국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막상 입원하고 보니 비용이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비싸다는 것이다.
병원입원비·진찰비·검사비·수술비·의사의 시술비 등이 한국의 5배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가족의 여비·체재비등을 몽땅 따져보니 국내에서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아 부담할 진료비의 약 20배에 육박하더라는 것이다.
또 도대체 언어가 통하지 않아 큰 불편을 겪게되어 마음을 고쳐먹고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그 후 L씨는 우리 흉부외과팀의 노력으로 완벽한 수술을 받아 「해피엔딩」을 맞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한국의 「부자」들이 국내에서도 다 치료되는 병을 고치러 쓸데없이 외국에 나가 막대한 돈을 낭비하고 있어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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